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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고린도전후서

고린도전서 - 부르신 그대로, 계명을 지키라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0. 8.

고린도전서 7장 17~20절

17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18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19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20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기독교인이 성경을 대하는 태도는 크게 둘로 나뉩니다. 하나는 맹신이고, 다른 하나는 무시입니다. 맹신하는 사람에게 성경은 지켜야 복을 받는 설명서입니다. 목사가 "
이것을 실천하십시오" 하면 그대로 따르고,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습니다" 하는 말까지 의심 없이 받아들입니다. 반대편의 사람은 세상이 성경과 상관없이 돌아간다고 생각합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애써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고, 믿음 좋다는 사람이 더 큰 고통을 겪는 일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교훈이 담긴 종교 서적쯤으로 여깁니다. 지켜도 이득이 없고 어겨도 손해가 없으니 능력 없는 책이라는 것입니다.

한쪽은 성경을 왜곡해서 이해하고, 다른 쪽은 성경을 무시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성경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정말 말씀대로 살고 있는지 묻기 전에, 먼저 무엇이 말씀을 지키는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설교자가 앞서 "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도 실천할 수도 없다"고 했다가 오늘은 "성도는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해석이 바뀐 것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눈이 아니라 성경의 눈으로 보면 '지킨다'는 말의 뜻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 1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할례를 받은 채 부르심을 받았다면 무할례자가 되려 하지 말고,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할례를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19절에 있습니다. 할례 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고 받지 않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여기에 수수께끼가 있습니다. 할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직접 명하신 계명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것을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계명은 지키라고 합니다. 앞뒤가 맞지 않아 보입니다. 이것이 풀리려면 한 가지 전제를 바꿔야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계명'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계명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계명을 십계명과 모세오경에 적힌 항목의 목록으로 이해합니다. 지금도 유대인에게 율법은 반드시 지켜야 할 거룩한 규정이고, 할례도 거기 들어 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문자에 있습니다. 무엇을 하라고 쓰여 있느냐가 중요하지, 그 계명이 왜 주어졌느냐는 별로 묻지 않습니다. 바울은 계명이 무엇을 하라고 하는지보다 하나님이 왜 그것을 주셨는지를 봅니다. 계명이 하는 일, 곧 계명의 기능에 시선을 둡니다. 같은 계명을 두고 한쪽은 항목을 보고 다른 쪽은 이유를 봅니다. 이 시각 차이는 피할 수 없는 충돌로 이어집니다.

그 충돌은 예수님 때부터 있었습니다. 안식일 문제로 부딪혔고,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문제로도 부딪혔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율법의 더 중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다는 것입니다(마 23:23). 두 이해는 타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언제나 갈등이 따라옵니다.

충돌의 뿌리를 파 보면 질문은 하나로 모입니다. 관심이 그리스도께 있는가, 나 자신에게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관심은 율법을 지키는 '나'에게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지켰는지, 남보다 얼마나 더 했는지를 따지게 됩니다. 복음의 관심은 오직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일에 있습니다. 입으로는 예수를 말하면서도 마음은 내가 한 일에 머물러 있다면 복음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고 선언한 까닭이 이것입니다(갈 5:2). 표면적으로는 "
할례를 받지 말라"는 말이지만, 속뜻은 이렇습니다. "예수의 은혜를 말하는 너희가 지금 어디에 관심을 두고 있느냐?"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던진 질문도 비슷합니다. 결혼해야 합니까, 독신이어야 합니까? 믿지 않는 배우자와 이혼해도 됩니까? 할례를 받아야 합니까? 모두 "
무엇을 어떻게 해야 성도다운가?"라는 하나의 질문입니다. 바울은 그 질문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되묻는 것입니다.

한 가지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이런 장면은 교회 어디서나 볼 수 있습니다. 결혼 십오 년 차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교회에 나오지 않았고, 아내는 새벽기도를 한 번도 거르지 않았습니다. 그녀에게는 늘 마음속 계산서가 있었습니다. 내가 이만큼 참고 기도하고 섬기면 하나님이 남편을 돌이키시겠지, 그래도 변하지 않는다면 내 믿음이 부족한 것이겠지 하는 계산서입니다. 집안에 다툼이 생기는 날이면 이렇게 물었습니다. "
내가 성도답게 살지 못해서 이런 걸까?"

어느 날 목사님이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집사님, 지금 집사님의 모든 질문에는 집사님만 나오고 예수님은 안 계시네요." 그 말이 그녀의 가슴에 박혔습니다. 남편이 변하느냐 마느냐, 자신이 성도답게 사느냐 못 사느냐는 예수님의 영광과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향해 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해 서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17절에서 하는 말이 이것입니다. 주께서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환경을 바꾸려 애쓰지 말라는 뜻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성도다움이라는 자기 관심에서 벗어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러 왔고,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지리라고 하셨습니다(마 5:17~18). 예수님은 율법의 항목을 하나하나 실천하는 방식으로 율법을 이루지 않으셨습니다. 율법의 완성인 사랑으로 이루셨고, 그 사랑의 모양이 십자가의 희생입니다. 율법 앞에서 심판받아야 할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계명이 이미 이루어졌다면 성도가 할 일은 그 사랑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런 질문에 매이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면 복을 받는가? 성도답게 살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가? 착하게 살면 하나님이 도우시는가? 구원받을 수 없던 죄인에게 이미 부어진 사랑이 자신의 전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전부입니다." 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 바울이 말하는 계명 지킴입니다.

20절은 "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상태로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할례자든 무할례자든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습니다. 날마다 죄를 짓는 자라는 것, 그리고 예수를 죽인 자라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았다고 죄를 이기게 되지 않고, 받지 않았다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둘 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 안에서 저주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에게 똑같은 본래 신분입니다.

그래서 할례는 성도 됨에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도 바리새파 출신 성도들이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키게 해야 한다고 주장해 큰 변론이 일었습니다(행 15:5). 베드로가 내놓은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행 15:11).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함은 "내가 이것을 했다"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반드시 행한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남보다 더 했는지 덜 했는지 비교하게 하며, 그 비교로 자기 신앙의 질을 평가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방해합니다.

디모데후서 1장 9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여 거룩한 소명으로 부르신 것이 우리의 행위대로가 아니라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신 은혜대로라고 말합니다. '부르심'은 본래 있던 자리에서 불러 내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저주 안에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를 건져 내어 부활의 생명이신 예수 안에 두셨습니다. 우리가 잘해서 된 일이 아닙니다. 사막 한가운데서 길을 잃고 쓰러진 사람을 구조대가 헬기로 끌어올리는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구조된 사람이 할 일은 자기가 얼마나 잘 걸었는지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건져 올린 이를 기억하고 알리는 것입니다.

성도의 소명도 이와 같습니다. 할례자는 할례자로, 무할례자는 무할례자로, 결혼한 사람은 결혼한 자로, 독신인 사람은 독신으로, 있는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증거하면 됩니다. 이것이 부름받은 자의 거룩한 소명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 신앙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됩니다. 좋은 신앙인이 되라는 소명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혼을 하든 독신으로 살든 이혼을 겪든,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시선이 가 있느냐입니다. 모든 관심이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으면 "
이혼하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같은 생각에 붙들리게 됩니다. 그것은 내 평판이라는 헛된 것에 매여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도 저주의 운명에서 우리를 건져 낼 힘은 없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든 하나님이 은혜로 이루신 일이 무효가 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부르신 그대로 지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대로 되는 것은 심판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의 방식으로 우리를 부르셨고, 그 은혜는 저주받을 존재인 나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입니까? 지키면 복 받는 규칙 모음집이 아니고, 지켜도 소용없는 낡은 책도 아닙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분만 가리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분을 아는 것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고, 그분이 나의 전부라는 믿음이 곧 순종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나눠 주신 대로, 부르신 그대로, 은혜를 전하는 도구로 존재하면 됩니다. 이것이 거룩한 소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