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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고린도전후서

고린도전서 - 이사 가는 집에는 못을 박지 않습니다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1. 6.

고린도전서 7장 29~34절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 마음이 갈라지며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


이사를 앞둔 집을 떠올려 보십시오. 짐을 싼 박스가 방마다 쌓여 있고 벽에는 걸려 있던 액자 자국만 남았습니다. 그 집에 사는 사람은 새 못을 박지 않습니다. 곧 떠날 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 집을 미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 밥도 짓고 잠도 자지만, 마음은 이미 새집에 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하려는 말이 이와 비슷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약속은 끝난 사건이 아니라 아직 열려 있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종말'이라고 부릅니다. 그날이 오면 세상의 모든 것이 멈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재림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마음은 눈앞의 현실에 쏠려 있습니다. 세상 방식을 따르지 않으면 당장 먹고사는 일이 불편해지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재림은 교리책 속의 말, 머릿속의 관념으로만 남기 쉽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늘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정말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며 살고 있는가?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일에 마음을 쏟습니다. 그중에서도 결혼과 취업은 인생의 행복을 가르는 일로 여겨집니다. 결혼하면 기쁘고, 취업이 되면 날아갈 듯합니다. 이 둘만 잘 풀리면 행복한 인생이 보장될 것 같습니다. 이것은 나쁜 마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솔직한 마음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바울이 말합니다. "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라."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입니다. 아내와 함께 살고, 물건을 사고팔고, 세상의 것을 쓰며 사는 것은 삶의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그것을 없는 것처럼 하라니,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재림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날 모든 것이 멈춥니다. 결혼으로 맺은 부부 관계도, 사고파는 일도, 우리가 누리던 모든 것도 그날에는 지나갑니다. 사람의 시간은 칠십, 팔십 년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남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성경이 보여 주는 참된 현실은 이것입니다.

"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는 말씀은 세상이 허무하다는 한탄이 아닙니다. 지나가되 끝을 향해 지나간다는 뜻입니다. 그 끝에서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새 세상이 영원히 이어지고, 성도는 그 새 세상에 속한 사람입니다. 세상을 없는 듯 여기라는 말은 세상을 업신여기라는 말이 아니라, 영원한 것에 마음을 두고 이 세상을 지나가는 곳으로 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말합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하면 주를 기쁘시게 할까 염려하고, 결혼한 사람은 어떻게 하면 배우자를 기쁘게 할까 염려하여 "
마음이 갈라진다"고 합니다. 여기서 오해하기 쉽습니다. 결혼하지 않으면 저절로 주를 기쁘시게 하며 사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독신인 사람도 결국 자기 기쁨을 위해 삽니다. 바울도 결혼 여부가 신앙의 조건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마음이 어떤 처지에서도 오직 주님을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갈라질 대상이 없다는 점을 짚은 말일 뿐입니다.

더 불편한 말도 있습니다. 배우자를 기쁘게 하려는 마음을 바울은 '세상 일'이라고 부릅니다. 결혼했으면 배우자를 기쁘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인데,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 상식이 굳어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생각으로 살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배우자를 기쁘게 하려고 염려하며 사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마음의 중심에는 언제나 '나의 기쁨'이 있습니다. 결혼 전에도 결혼 후에도 그렇습니다. 어쩌다 배우자를 위해 애를 써도 그 속에는 인정받고 싶은 마음, 좋은 배우자로 보이고 싶은 마음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니 "
그럼 배우자를 기쁘게 하지 말란 말입니까?" 하고 따질 처지도 못 됩니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의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주의 일'은 무엇일까요? 보통은 전도나 선교, 교회가 인정하는 신앙 활동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열심히 전도했는데 기대한 열매가 없으면 우리는 실망합니다. 그 실망 속에는 주님의 기쁨이 아니라 나의 기쁨이 걸려 있었다는 뜻입니다. 선교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선교가 무엇인지, 누가 선교의 주체인지를 성경에서 바르게 배워야 합니다.

주의 일은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 주께서 행하시는 일입니다. 주님은 성령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인지 깨닫게 하십니다. 사람에 대해 절망하게 하시고, 그 자리에서 십자가로 이루어진 주님의 의로우심에 마음을 두게 하십니다. 이것이 주의 일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무력함을 알고 오직 은혜를 바라보며 십자가로 증거 된 은혜를 고백할 때 그 일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이 있으면 그것이 '주의 일을 열심히 하는 모습'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쉽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믿음을 보여 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다 보면 믿음이 서로 견주는 도구가 되고, 주의 일이라는 이름으로 하는 일이 사실은 나를 위한 세상일이 되고 맙니다. 참된 믿음은 이것을 분별하게 합니다.
내 믿음을 보여 주고 싶은 마음은 믿음이 무엇인지 아직 모른다는 표시입니다. 믿음은 나를 향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데, 우리는 믿는 나 자신에게 눈길이 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믿음으로 사는 것일까'를 붙들고 씨름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무엇을 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는 말씀처럼, 믿음은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 의 앞에서 자신의 무능을 알게 하고, 예수님의 의의 세계, 은혜 속으로 깊이 들어가게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그분의 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영원한 영광으로 들어가는 날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사람의 의가 아니라 주님의 의가 드러나는 것에 마음을 둡니다. 그렇게 주님의 의 안에서 사는 사람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나' 하는 걱정에 매이지 않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 하지 못하든, 열매는 믿음으로 맺히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가 성도를 자유롭게 합니다. 삶의 형편이 어떠하든, 내 행실이 어떻게 보이든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사 가는 집에서 못을 박지 않는 사람은 불편해 보여도 사실은 가장 홀가분한 사람입니다. 새집이 이미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완성될 새 세상이 약속되어 있으니, 성도는 지나가는 이 세상에서 주님의 은혜에 기대어 자유롭게 삽니다. 그것이 지나가는 세상 속에서 종말을 사는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