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린도전서 3:5~7)
어느 작은 마을에 두 명의 농부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봄마다 가장 먼저 밭에 나가 씨앗을 심는 것으로 유명했고, 다른 한 사람은 가뭄이 와도 꾸준히 물을 길어다 밭을 적시는 것으로 이름이 났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두 농부를 비교하기 시작했습니다. "씨앗을 심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아. 심는 사람이 더 중요하지." "무슨 소리야, 물을 주지 않으면 싹이 나도 다 타죽고 말잖아. 물 주는 사람이 진짜야." 마을의 작은 광장에서는 이 논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 유난히 혹독한 가뭄이 들었습니다. 두 농부는 어느 때보다 더 열심히 씨를 심고 물을 날랐습니다. 하지만 그해 가을, 이상하게도 그 둘의 밭에서는 거의 아무것도 자라지 않았습니다. 반면 마을 변두리에 있는 한 노인의 작은 밭에서는 탐스러운 열매가 가득 맺혔습니다. 노인은 무릎이 좋지 않아 씨도 제대로 심지 못했고 물도 충분히 주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 밭을 자라게 한 것일까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는 바로 이 물음에 대한 답이 담겨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당시 심각한 내분을 겪고 있었습니다. "나는 바울 편이다", "나는 아볼로 편이다"라며 서로 자기가 따르는 지도자를 내세우고 다른 편을 깎아내리는 분파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이것은 단순한 교회 정치 싸움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것을 단순한 정치적 갈등이 아니라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 즉 영적인 눈이 멀어버린 상태로 진단합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주변에도 비슷한 풍경이 자주 펼쳐집니다. "저 목사님 설교는 정말 명쾌해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게 됐잖아요." "아니, 저쪽 목사님은 봉사와 선교에 얼마나 헌신적인지 몰라요." 사람들은 어느새 하나님의 일을 사람의 능력으로 환산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능력을 기준으로 편을 가르고, 줄을 세우고, 우열을 다툽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2천 년 전 지중해 연안의 어느 교회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울은 이 편지에서 놀라운 말을 합니다.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자기 자신을 향해 스스로 "당신은 도대체 무엇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답합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심는 자도, 물 주는 자도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처음 들으면 지나치게 겸손한 수사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혹은 "그래도 심고 물 주는 역할이 있으니 셋이 잘 협력해서 좋은 결과를 내자"는 역할 분담론처럼 읽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만약 심는 역할과 물 주는 역할이 중요하다는 뜻이었다면,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다시금 "그러면 바울이 심은 게 더 중요해, 아니면 아볼로가 물 준 게 더 중요해?"라는 논쟁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핵심은 훨씬 더 급진적입니다. 자라는 것 자체가 심거나 물을 준 결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라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며, 사람의 심음과 물 줌은 그 자라남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를 이해하기 위해 다시 농부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합니다. '씨를 심고 물을 주면 자라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이 자라게 하신다는 말은, 그 과정 전체를 하나님이 섭리하신다는 의미겠지. 그러니 우리가 열심히 심고 물 줘야 하나님도 자라게 하실 수 있다.' 이 생각은 매우 합리적이고 신앙적으로도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이 생각의 밑바닥에는 사람의 행함이 결과의 원인이 된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 논리가 구원의 문제로 이어지면 이런 말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물론 구원은 하나님이 하시죠. 그렇지만 믿음생활도 제대로 안 하면서 구원받기를 기대하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듣기에 합당한 말 같지만, 이것은 결국 사람의 행함이 구원의 조건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인정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사람의 공로를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것을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하는 것"이라고 부릅니다.
한 어머니가 오랫동안 아이를 기다렸습니다. 어렵게 얻은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습니다. 어머니는 밤마다 아이 곁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정성을 다해 돌봤습니다. 아이가 건강하게 자랐을 때, 주변 사람들은 어머니의 헌신 덕분이라고 칭찬했습니다. 어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습니다. "내가 한 게 뭐가 있나요. 그 아이가 살아있을 수 있었던 건 내 정성이 아니에요. 나는 그저 곁에 있었을 뿐이고, 그 아이를 살게 하신 분이 따로 계신 거죠."
이 어머니의 말이 단순한 겸손이 아니라 진심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사역자의 정신입니다. 자신이 곁에서 정성을 다했다는 사실이 자라남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는 사람은 자신의 역할을 다른 사람의 역할과 비교하거나 경쟁하지 않습니다. 비교와 경쟁은 "내가 더 잘 심었다, 내가 더 열심히 물을 줬다"는 생각에서 오는데, 자라나게 하시는 분이 따로 계신다는 것을 정말로 안다면 그 비교 자체가 의미를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5절에서 한 가지를 더 말합니다.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이 구절은 묘하게 읽힙니다. 바울과 아볼로가 고린도 사람들을 믿게 한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앞에 결정적인 단서를 답니다.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믿게 된 것은 주께서 그들을 바울과 아볼로에게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믿게 한 주체는 사역자가 아니라 주님이시고, 사역자는 주님이 이미 정하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달하는 통로였을 뿐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면 사역자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사역자의 능력이나 열정이나 카리스마가 사람을 믿음으로 이끄는 것이 아닙니다. 사역자가 아무리 뛰어나도 주께서 주시지 않은 사람을 믿게 할 수 없고, 사역자가 아무리 부족해도 주께서 주신 사람은 믿게 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역자를 비교하고 줄 세우는 일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가 분명해집니다.
현대 교회 안에도 이와 비슷한 혼동이 넘쳐납니다. 특정 목사의 설교 방식, 부흥 집회에서의 감동적인 체험, 많은 헌금과 봉사와 선교 활동들이 신앙의 증거이자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표시로 여겨집니다. 물론 그것들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자라남의 원인이 되는 것처럼, 또는 하나님을 움직이는 조건이 되는 것처럼 여겨질 때입니다. 그 순간, 사람들은 자신의 행함에 집착하기 시작하고, 자기가 한 일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 자부심은 어느새 십자가의 은혜를 가리는 장막이 됩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공로가 전부입니다. 사람으로 인해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자신의 역할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심었든 물을 줬든, 그것이 자라남의 공로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의 역할과 자신의 역할을 비교하며 싸우지 않습니다. 비교할 이유 자체가 없어진 것입니다.
처음의 농부 이야기에서 가뭄의 해에 노인의 밭에서 열매가 맺혔을 때, 마을 사람들이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면 어땠을까요? 그들은 더 이상 씨를 잘 심는 사람과 물을 잘 주는 사람을 비교하며 싸우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라게 하시는 분이 따로 계신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 앞에서 자신들의 심음과 물 줌을 자랑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하려는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고백은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다"입니다. 이것은 패배의 선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고백 안에서만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비교에서 자유롭고, 경쟁에서 자유롭고, 자신이 이룬 업적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집니다. 그리고 그 자유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심는 이도 아니고 물 주는 이도 아닌, 오직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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