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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

디모데전서 - 한 분 중보자, 그리스도 예수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2. 22.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디모데전서 2:5~6)

어느 오래된 항구 도시에 두 종류의 뱃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무리는 목적지를 향해 나침반을 붙들고 바람과 파도와 씨름하며 항해하는 사람들이었고, 또 다른 무리는 항구에 머물면서 배를 얼마나 잘 닦고 꾸미느냐를 놓고 서로 다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후자의 사람들에게 배는 더 이상 항해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배는 자신의 솜씨와 지위를 드러내는 전시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를 쓸 당시 에베소 교회의 풍경이 꼭 이와 같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신화와 족보를 파고들며 누구의 해석이 옳은지를 두고 날카로운 논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은 더 이상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종교적 탁월함을 증명하는 도구가 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러므로"라는 말로 편지를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논쟁이 가득 찬 공동체를 향해 그는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킵니다. 기도로 돌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기도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기도와 조금 다른 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라는 네 가지 표현을 한꺼번에 쏟아냅니다. 굳이 다른 단어를 네 개나 나열한 것은 기도의 종류를 분류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사랑을 표현할 때 "사랑하고, 아끼고, 귀히 여기고, 감사한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나의 방향을 향한 온 마음의 집중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 방향이 바로 문제의 핵심입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거리에 지나다니는 모든 이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원문의 뉘앙스를 따라가면 '사람들이 추구하는 모든 것'이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결국 자신의 행위로 의로움을 쌓고, 그 의로움으로 높아지고, 마침내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종교심이 향하는 곳입니다.

한 번은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술도 안 마시고, 남에게 해코지도 안 하고, 교회도 빠지지 않고 나갑니다.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실 리 없어요." 그 말 안에는 자신이 쌓아 올린 도덕과 종교적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충분히 설 수 있다는 확신이 담겨 있었습니다.

바울이 보기에 이것이 바로 기도가 향해야 할 지점인 것입니다. 그 확신의 자리로부터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도록 초청하는 기도, 그것이 바울이 말하는 기도의 본질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이 구절을 읽으며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근거로 삼습니다. 그런데 이 해석은 한 가지 중요한 질문 앞에서 흔들립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을 화형에 처하고 사자 앞에 던진 로마 황제를 위해 기도했을 때, 과연 평안하고 고요한 신앙생활을 누렸습니까? 역사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핍박은 계속되었고 순교자는 늘어났습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높은 지위"로 번역된 단어는 고린도전서에서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번역된 바로 그 단어입니다. 철학적으로,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스스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움, 혹은 교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결국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란 세상의 정치 지도자에 국한된 표현이 아니라, 자기 의로 인해 높아질 대로 높아진 모든 사람, 율법적 행위를 믿음의 증거로 착각하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왕이 되고 싶어 합니다. 누구나 자신이 가장 옳고, 가장 훌륭하고, 가장 높은 자리에 앉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창세기 11장에서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의 마음이었고, 오늘날 종교의 이름으로 자기 공로를 쌓는 사람들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그 십자가 앞에서도 여전히 무언가를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마음, 그것이 우리 안의 죄성입니다. 그러므로 이 죄성을 아는 자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는 결국 자기 왕좌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기도의 목적이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경건"이라는 단어도 우리의 통념과 다른 곳을 가리킵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성전 미문 앞에 앉아있던 다리 저는 사람을 일으킨 이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베드로는 자신의 경건이 그 기적을 일으킨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경건은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침마다 성경을 읽고,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며, 예배를 빠지지 않는 것, 이것들은 분명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진정한 경건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그것을
"경건의 비밀"이라고 불렀습니다.

비밀이란 내가 계산하고 노력하여 얻어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평안과 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환경이 좋아졌을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로 높아지려는 욕망의 실체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마침내 이 모든 이야기의 핵심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중보자란 두 세계를 이어주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완전한 사람이어야 하고, 죄인의 눈에는 완전한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충족하는 분은 오직 한 분입니다.

에베소 교회 안에는 스스로 중보자를 자처하며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시대를 향해, 그리고 어쩌면 모든 시대를 향해 중보자는 단 한 분이며, 그분은 이미 오셨다고 선언합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다"는 표현에서 "위하여"로 번역된 단어는 '때문에'라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것이 아니라, 죄인인 모든 사람 때문에 대속물이 되셨다는 의미를 함께 지닙니다. 이것은 언약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밝힙니다. 자신이 이방인의 스승이 된 것은
"믿음과 진리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말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모든 경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무의미해집니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가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며, 거기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결국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하고자 한 것은 단순하면서도 깊은 하나의 메시지입니다.
"논쟁하지 말고 기도하라." 그런데 그 기도는 환경을 바꿔달라는 청원이 아니라,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것, 즉 자기 의와 자기 높아짐의 자리에서 떠나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도록 초청하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 초청은 이미 이루어진 십자가 위에 근거합니다.

항구에서 배를 닦으며 다투던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하나입니다.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것, 그리고 그 항해를 가능하게 하는 한 분 선장을 신뢰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