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디모데전서 1:4,5,11)
에베소는 당시로 보면 ‘성공한 도시’였습니다. 웅장한 아데미 신전, 활발한 상업, 수많은 순례자와 관광객, 그리고 그들을 상대로 한 종교 산업, 오늘날로 치면 대형 쇼핑몰과 관광지, 거대한 종교 랜드마크가 결합된 도시였습니다. 그런 곳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복음이 들어간 자리에는 반드시 다른 교훈도 함께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에베소에 남겨둔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은 외부의 박해보다 내부에서 자라나는 ‘다른 교훈’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노골적으로 “예수는 거짓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면서, 십자가를 살짝 비켜 가는 방식으로 다가옵니다.
다른 교훈은 언제나 ‘본질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다른 교훈”이라는 말을 쓸 때 ‘헤테로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같은 종류 안에서 조금 다른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종류라는 뜻입니다. 마치 겉보기에는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전혀 다른 신앙처럼 말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장면은 낯설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잘된다.” “신앙은 인생을 성공으로 이끄는 지혜다.” “교회는 당신의 가능성을 실현시켜 줄 공동체다.” 말은 경건해 보이지만, 중심에 십자가의 죽음이 없다면 그것은 다른 교훈입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우리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자랑할 것이 없고, 내세울 공로가 없고, 나를 증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십자가 대신 이야기를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한 ‘신화’입니다.
신화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만듭니다. 신화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말하는 것 같지만, 결국 사람의 능력과 공로가 빛나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목회자가 어떻게 교회를 성장시켰는지, 어떤 믿음의 사람이 어떤 기적을 이루었는지, 어떤 가문이 얼마나 위대한 신앙의 혈통인지를 말합니다. 족보도 마찬가지입니다. 족보는 “나는 누구에게서 왔는가”를 증명하는 수단입니다. 유대인들은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부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이렇게 바뀝니다. “우리는 정통 교단이다.” “우리 교회는 100년 전통이 있다.” “우리 목사는 박사 학위가 있다.” “우리 교회는 이 지역에서 가장 크다.” 이 모든 것이 틀렸다는 말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이 복음의 자리를 대신할 때입니다. 족보에 몰두하면 반드시 비교가 시작됩니다. 비교는 경쟁을 낳고, 경쟁은 논쟁을 낳게 됩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결국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은 사라지고 변론만 남게 됩니다.
바른 교훈은 사람을 낮추고, 십자가를 높입니다. 바울은 바른 교훈의 목적을 이렇게 말합니다.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 이것은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조금 더 착해지고, 조금 더 정직해지고, 조금 더 노력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상태입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내 마음속에서 내가 주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선한 양심이란, 스스로를 변호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입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이란, 나를 증명하려 애쓰지 않는 믿음입니다. 이 모든 것은 십자가 앞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누구도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만 남습니다. 그래서 바른 교훈은 언제나 우리를 십자가로 데려갑니다.
율법을 붙잡을수록 우리는 더 죄인이 됩니다. 사람들은 율법을 좋아합니다. “이렇게 하면 된다”는 말이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율법은 의인을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 세워진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고쳐주는 약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병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진단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진단서를 붙잡고 스스로 치료하려 합니다. 그 순간 율법은 생명이 아니라 정죄가 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이 반복됩니다. “이 정도는 해야 성도다.” “이 정도 헌신은 해야 믿음이다.” “이 정도 열심이 없으면 문제다.” 이 말들이 십자가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다른 교훈입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이미 죽었다.” “너는 이미 끝났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다.”
바른 교훈은 복음 ‘아래’에 있습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이 바른 교훈은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 아래”에 있다고 말합니다. 복음 위에 교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 아래에 교훈이 있다는 말입니다. 십자가 위에 우리의 교훈을 올려놓는 순간, 그것은 신화가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 아래에서 교훈을 들을 때, 우리는 안식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휘기아이노’, 곧 건강함이고 샬롬인 것입니다.
하루를 살다 보면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집니다. 신앙마저도 나를 돋보이게 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싶어집니다. 그때마다 십자가는 우리를 다시 부릅니다. “함께 죽자.” “그리고 함께 살자.” 바른 교훈은 우리를 성공으로 이끌지 않습니다. 대신 죽음으로 이끕니다. 그러나 그 죽음 안에서만 참된 생명이 시작됩니다. 이것이 복음이고, 이것이 교회이며, 이것이 성도의 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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