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디모데전서 2:15)
어느 날, 어떤 목사님이 성도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여자는 왜 잠잠해야 합니까?" 그러자 성도들은 저마다 익숙한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하와가 먼저 죄를 지었으니까요." "여자는 가르치는 역할이 아니니까요." "성경이 그렇게 말하니까요." 그 대답들이 틀린 것은 아닐지 모릅니다.
하지만 목사님은 잠시 침묵한 뒤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 본문에서 남녀의 역할 규정만 읽어낸다면, 바울이 이 편지를 쓴 진짜 이유를 놓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디모데전서 2장 8절부터 15절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을 교회 내 남녀 역할 분담의 근거로 읽어왔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 편지를 쓴 맥락을 따라가다 보면, 본문은 단순한 조직 운영 지침이 아니라 훨씬 더 깊은 복음의 신비를 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 편지를 쓰면서 처음부터 한 가지 문제를 집요하게 다루고 있었습니다. 바로 "다른 교훈"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이 신화와 족보에 집착하며 복음 대신 공허한 논쟁을 퍼뜨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선생이 되고 싶어했고, 화려한 지식으로 스스로를 치장하려 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남자와 여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만약 이것이 단순히 "남자는 이렇게, 여자는 저렇게 행동하라"는 지침이라면, 문맥의 흐름이 어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을 이야기하다가 뜬금없이 복장 규정과 발언 제한으로 넘어간다는 것이 과연 자연스러운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여전히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이야기를 "남자"와 "여자"라는 언약적 언어로 풀어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그러므로"라는 말은 앞의 내용과 이어집니다. 한 분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대속물로 주셨다는 선언 다음에 나오는 말입니다. 즉 "그 중보자로 인하여" 이제 남자들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쓰인 헬라어 '아네르'는 단순히 생물학적 남성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성경은 남녀 관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계시해왔습니다. 에베소서 5장이 그 대표적인 본문입니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되심을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그렇다면 "남자가 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 내에서 발언권을 가진 성인 남성이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땅에 남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된 자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된 자, 곧 복음을 전파하도록 세움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한다"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손"은 능력과 행함을 상징합니다. "거룩한 손"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곧 십자가의 일하심이 그 사람을 통해 드러남을 뜻합니다. 기도란 우리가 원하는 것을 구해 얻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내 안에 담아내는 일입니다. 분노와 악한 생각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능력으로 채워진 상태로 세상 앞에 서는 것, 그것이 "남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제 9절부터 여자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이와 같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남자가 그리스도와 하나 된 자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여자는 그 복음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된 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여자의 단장에 대해 두 가지를 대조시킵니다. 한쪽에는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이 있습니다. 당시 에베소의 아르테미스 신전 문화에서 이런 치장은 종교적 과시와 맞닿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약적 관점에서 보면 이것들은 더 깊은 무언가를 상징합니다. 말씀을 많이 쌓아 지식적으로 우두머리가 되려는 태도, 변하지 않는 진리를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이용하는 것, 자신의 수고와 노력을 자랑하는 것,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기 의를 걸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내의 단장은 외모가 아니라 남편에게 순종하는 정결한 행실이라고 말입니다. 썩는 것과 썩지 않는 것의 차입니다.
반대편에는 "단정한 옷, 소박함, 정절, 선행"이 있습니다. "단정하게"라는 말은 '질서 있게, 고결하게'라는 뜻이고, "옷을 입는다"는 표현은 '그 안에 들어가다'라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7절이 떠오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즉 교회가 된 여자의 단장은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 그분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소박함"은 경건으로 인한 겸손이고, "정절"은 흔들리지 않는 안정된 마음입니다. 다른 교훈의 미혹이 몰려와도 흐트러지지 않는 상태, 그것이 교회의 참된 모습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성도가 여러 신학 강의를 듣고 방대한 지식을 쌓은 뒤, 그 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판단하려 한다면 그것은 "땋은 머리"의 모습입니다. 반면 같은 말씀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깨닫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드러내는 삶으로 반응한다면, 그것이 "단정한 옷을 입은"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11절과 12절이 종종 논란이 됩니다.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이것을 문자 그대로 읽으면, 교회에서 여성은 발언하거나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규정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조용함"과 "순종"은 성별 제한이 아니라 언약적 자세를 가리킵니다. "조용히"의 원어는 '헤쉬키아', 곧 고요함과 안정입니다. 그리고 "배우라"는 말은 '마음을 향하게 하다, 그분에게로 익숙해지다'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자기 목소리로 세상을 지배하려는 존재가 아니라,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조용히 마음을 기울이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관한다"는 말인 '아우덴테오'는 '지배하다, 다스리다'라는 뜻입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다스리려 한다면 그것은 본질의 전복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 앞에서 교회는 할 말을 잃은 자입니다. 로마서 3장의 표현처럼, 모든 입이 막히고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되는 자리가 바로 거기입니다.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13절과 14절은 그 이유를 창조 언약으로 설명합니다.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에 지음을 받았습니다.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라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습니다.
이것은 여자가 열등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창조의 순서와 타락의 경위를 통해, 왜 교회가 그리스도의 머리 됨 아래 있어야 하는가를 언약의 언어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은 이 구조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고,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위계는 지배와 억압의 구조가 아니라, 구원이 흘러오는 언약의 통로인 것입니다. 하와가 속아 죄에 빠진 것은 비극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비극이 두 번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필요로 만들었습니다. 죄 아래 매인 여자가 있었기에, 그 여자를 위해 오신 구원자가 있습니다. 언약의 완성은 그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15절은 이 모든 흐름의 정점입니다.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그러나, 라는 말이 반전을 만듭니다. 죄 아래 있었지만, 구원이 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하와를 향한 말입니다. 원문에 "그녀의" 라는 표현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해산"은 단수로 쓰였습니다. 수많은 출산이 아니라, 하나의 결정적인 출산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낳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5절이 그 장면을 보여줍니다.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낳는 존재입니다. 복음을 드러내고, 그 복음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을 만드는 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그것이 해산이고, 그것이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세상이 복음을 거부하고 비웃더라도, 교회가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 안에 머물러 예수 그리스도를 낳아낸다면, 진리의 진리 됨은 반드시 드러납니다.
다시 그 목사님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성도들의 대답은 틀리지 않았지만, 무언가 중요한 것을 빠뜨리고 있었습니다. 이 본문은 여자를 억제하기 위한 규정이 아닙니다. 이 본문은 교회가 무엇으로 자신을 단장해야 하는가에 대한 복음적 선언입니다.
땋은 머리와 금과 진주와 값진 옷, 즉 지식의 자랑, 수고의 자랑, 경건해 보이는 외양은 교회의 단장이 아닙니다. 교회의 단장은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그분께 마음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단장된 교회가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낳는 것, 그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은 결국 이것이었습니다. 다른 교훈에 미혹되지 말고, 신화와 족보의 장식을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단 하나의 단장으로 서십시오. 그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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