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디모데전서 3:1~7)
우리는 흔히 어떤 자리에 앉을 사람을 고를 때 조건을 따집니다. 학력, 경력, 성품, 가정환경.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목사를 세우거나 장로를 임직할 때 디모데전서 3장이 빠지지 않고 등장합니다.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이 구절들은 마치 지원서 심사 기준표처럼 사용됩니다. 그러나 이 본문을 그렇게 읽는 순간, 우리는 이미 길을 잃은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기준에 합당한 사람이 과연 있습니까?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가장 큰 책망거리입니다. 결국 이 본문을 자격 조건의 목록으로 읽으면, 본문이 우리에게 선언하는 것은 단 하나뿐입니다. "너희 중에 감독이 될 자격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무엇을 말하려 한 것입니까?
바울은 이 편지를 쓰기 직전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먼저 고백했습니다.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며 "죄인 중의 괴수"였다고 했습니다(딤전 1:13~15). 그런 자에게 주님께서 긍휼을 베푸신 까닭은, 그 은혜가 얼마나 크고 넘치는 것인지를 온 세상 앞에 증명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우리 주의 은혜"라고 불렀습니다. 개인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선물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아들이 된 모든 교회가 함께 누리는 은혜라는 뜻입니다.
바로 그 고백 직후에 바울은 감독에 대해 말합니다. 맥락이 중요합니다. "죄인 중의 괴수도 은혜를 입었다"는 선언 다음에, 갑자기 "그러나 감독이 되려면 이런 조건을 갖춰야 한다"고 돌아선다면, 이것은 앞에서 한 말을 스스로 뒤집는 것입니다. 은혜를 말했다가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런 사람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미쁘다 이 말이여"는 '만일 말씀이 신실하다면'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신실한 말씀에 근거하여 말한다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감독"으로 번역된 헬라어 '에피스코페'는 직위나 직함이 아니라 '돌봄, 방문, 주시함'이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나인성에서 죽은 아들을 살리신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이 외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에피스켑토마이)." 감독이란 바로 이 돌봄, 이 찾아오심, 이 하늘로부터의 주시함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구약의 '파카드'가 바로 그 뿌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 이스라엘을 찾아오시는 것, 룻기에서 기근 중에 백성을 기억하시는 것, 시편에서 자신의 영을 하나님께 부탁하여 맡기는 것, 이 모든 것이 '파카드'의 언어입니다. 찾아오심, 맡겨짐, 그리고 그 찾아오심이 심판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감독이란 이 모든 의미를 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감독을 원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본문은 그것이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울이 말하는 "선한 일"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된 구원의 일입니다. 감독을 원한다는 것은 그 십자가에 마음이 붙들린 상태, 그 복음을 갈망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감독이 되고 싶으면 선한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감독을 사모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복음을 사모하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어느 부흥사가 오래된 마을 교회를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 교회 담임 목사는 신학 학위도 없고, 설교가 화려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했습니다. "저 분은 언제나 먼저 찾아옵니다. 아픈 사람 곁에 있고, 슬픈 사람 곁에 있고, 길 잃은 사람 곁에 있어요." 부흥사가 그 목사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십니까?" 그는 잠시 생각하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저 주님이 먼저 저를 찾아오셨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뿐입니다." 이것이 감독입니다. 먼저 찾아오시는 주님을 알고, 그 찾아오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2절부터 이어지는 목록들은 바로 이 전제 위에서 읽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그러므로"가 핵심입니다. 신실한 말씀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마음이 붙들린 자라면, 그 다음에 열거되는 모습들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자격 조건이 아니라, 복음 안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는 흔적입니다.
"한 아내의 남편"이라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읽으면 성별 제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뒤집으면 '한 여자의 남자'가 됩니다. 바울은 앞서 남자를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로 이미 설명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 하나만을 사랑하시듯, 교회만을 아내로 삼는 자라는 뜻입니다.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를 낳고 해산하게 하는 역할, 그것이 감독의 일입니다.
"절제하며"는 진리를 품고 있는 깨어 있는 상태입니다. "신중하며"는 건전한 마음으로 충동과 욕망에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단정하며"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고결한 모습입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며"에서 나그네란 진리를 찾아 헤매는 자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율법의 짐을 지우는 것은 환대가 아니라 폭력입니다.
"가르치기를 잘하며"는 지식을 많이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하는 것입니다.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딤후 2:24). 종이 잘 가르친다는 것은 주인의 말을 충실히 전한다는 뜻입니다. 그 주인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3절의 목록들도 같은 결을 갖습니다.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에서 술은 발효된 누룩으로 만들어집니다. 성경에서 누룩은 사람의 교훈, 비진리, 율법적 행위주의를 상징합니다(마 16:11~12, 고전 5:6~8). 사람을 취하게 하는 것은 꼭 알코올만이 아닙니다. 그럴싸한 종교적 언어, 자기 공로를 쌓게 만드는 교훈, 감동적인 체험담으로 사람을 흥분시키는 것, 이것이 영적인 술입니다.
"구타하지 아니하며"는 비진리를 강요하여 율법의 행위를 하도록 압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에서 돈은 자신의 노력과 행위로 쌓아올린 공로, 곧 자기 의를 상징합니다. 돈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4절의 "집"은 성전이고, 신약에서 성전은 교회입니다. 감독은 교회를 말씀으로 앞에서 인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똑바로 세우는 자입니다. "복종하게"는 억압적 순종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으로 잘 정돈하고 배열하여 흩어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이것을 건물 안에 사람들을 잘 배치하고 프로그램에 묶어두는 것으로 대체해 왔습니다. 그것은 감독이 아닙니다.
6절에서 "새로 입교한 자"란 유대교의 지식을 가지고 교회로 들어온 자입니다. 구약을 안다는 자부심으로 감독 역할을 하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마귀를 허용하신 언약의 깊이를 알지 못한 채 무조건 마귀를 정죄하는 함정에 빠집니다. 지식이 교만을 낳고, 교만이 심판을 낳는 것입니다.
7절의 "외인"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에게서 "선한 증거"를 얻는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단 하나의 방법입니다. 오직 십자가만 말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들도 알아보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섞지 않으니까, 비방의 빌미도 없고 유혹의 올무도 없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건물이 없었습니다. 로마 정부의 감시와 유대교의 핍박 속에서 집집마다 모여 조용히 말씀을 나눴습니다. 그 공동체에서 감독이 된다는 것은 화려한 직함이 아니라 전적인 책임이었습니다. 위험이 닥치면 가장 먼저 표적이 되는 자리, 때로는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자리였습니다.
에베소 교회에는 그 자리를 자신의 능력과 자격으로 차지하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이 본문에서 말하는 것은 그런 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하여 합격자를 가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 본문의 기준에 합당한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선언함으로써, 결국 진짜 감독은 오직 한 분뿐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것을 말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5). 목자이시며 감독이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그분이 먼저 돌보셨습니다. 그분이 먼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교회는 그분을 흉내 내는 자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그분의 십자가만 드러나도록, 그분만 보이도록, 자신을 내려놓은 자들이 그분과 한몸이 되어 이루는 공동체입니다. 그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 그 일을 맡아 앞에 선다면, 그것은 자격을 갖춰서가 아닙니다. 그저 그 십자가에 사로잡혀서, 달리 아무것도 말할 수 없어서, 그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감독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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