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고린도전서 3:3~4)
어느 작은 교회에 두 집사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매주 빠짐없이 봉사하고, 헌금도 넉넉히 내고, 새벽기도도 거르지 않았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조용히 자리를 지키며 별다른 봉사도 없이 예배만 드렸습니다. 교인들의 눈에는 첫 번째 집사가 훨씬 믿음직스러워 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첫 번째 집사가 자신보다 더 많은 칭찬을 받는 사람이 생기자 마음이 불편해졌습니다. 그 불편함은 곧 은근한 경쟁심이 되었고, 나중에는 상대방을 흠잡는 말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자신도 알아채지 못한 사이에 봉사를 통해 자기 자신을 쌓아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라고 했을 때, 그 말은 단순히 다투지 말라는 도덕적 훈계를 향해 있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겨누고 있는 것은 더 깊은 곳, 즉 우리가 무엇을 중심으로 살아가느냐 하는 존재의 방향이었습니다.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살던 시절의 바울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길리기아 다소 출신에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고, 율법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열심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명문대 출신에 화려한 이력, 그리고 종교적 헌신까지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이 모든 것은 자랑이었고, 그 자랑은 곧 자신이 의롭다는 증거였습니다. 세상은 늘 그런 방식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사람은 그 평가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그가 만난 것은 그 모든 자랑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빛이었습니다. 그 이후 바울이 말하는 자랑의 언어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이것은 단순히 겸손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 자체가 바뀐 것입니다. 인간의 의로 세상을 보던 눈이, 하나님의 의로 세상을 보는 눈으로 전환된 것입니다.
이 전환이 복음이 사람에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흔히 믿음이 있으면 삶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착해지고, 더 거룩해지고, 더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여깁니다. 물론 그 생각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생각이 어느 순간부터 "나는 믿음이 있으니 저 사람보다 더 잘 살아야 한다"는 방향으로 굳어질 때, 그것은 복음의 언어가 아니라 세상의 언어가 됩니다.
구제를 예로 들면, 누군가 어려운 이웃을 돕습니다. 그것은 분명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 구제가 '나는 이런 사람이다'를 증명하는 수단이 되는 순간, 그 안에는 미묘한 경쟁심이 싹틉니다. 더 많이 도운 사람을 보면 위축되고, 덜 도운 사람을 보면 우월감이 생깁니다.
구제라는 행위 자체가 더러워진 것이 아닙니다. 그 행위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쌓으려는 방향이 더러워진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육과 영의 더러운 것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행위의 종류가 아니라, 행위를 움직이는 중심의 방향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얼마나 가졌느냐, 얼마나 성공했느냐, 얼마나 인정받고 있느냐, 교회 안도 예외가 아닙니다. 얼마나 봉사하느냐, 얼마나 헌금하느냐, 얼마나 기도하느냐, 이 질문들은 언뜻 거룩해 보이지만, 그 밑바닥에 흐르는 논리는 세상의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더 많이 행할수록 더 가치 있는 성도라는 논리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나는 바울에게라", "나는 아볼로에게라"고 했을 때, 표면적으로는 존경하는 스승을 내세우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더 권위 있는 이름을 가짐으로써 자신의 신앙적 위상을 높이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치를 높여주는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봉사하지 말아야 하는가, 구제를 멈춰야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행위의 유무가 아니라 행위의 중심입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이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시겠다고 했을 때, 그 새 마음을 부드러운 마음이라고 불렀습니다. 굳은 마음은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는 긴장으로 굳어진 마음입니다. 부드러운 마음은 이미 받은 은혜 안에서 쉬는 마음입니다. 부드러운 마음으로 율례를 행할 때, 그 행함은 자신을 확인하는 수단이 아니라 은혜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 됩니다.
성도가 지켜야 할 것은 자신의 신앙적 이미지가 아닙니다. 자신을 거룩한 존재로 불러주신 그 은혜의 근거, 즉 십자가입니다. 어떤 행함이 있든 없든, 구원의 의는 오직 그리스도이심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육신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의 실제 내용입니다.
처음에 소개한 두 집사 이야기로 돌아 가서, 봉사도 없이 조용히 예배만 드리던 두 번째 집사가 어느 날 이런 말을 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저는 제가 뭘 잘해서 여기 있는 게 아니에요. 그냥 제가 여기 있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저는 신기할 뿐이에요."
그 말 안에 담긴 것이 바울이 말하는 새 마음입니다. 자신의 행함으로 자신의 자리를 만들려 하지 않고, 이미 만들어진 자리 앞에서 그저 감사하는 마음, 그 마음이 시기를 몰아내고, 분쟁을 잠재웁니다. 누군가와 비교할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가치를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가치 있게 해주신 은혜를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그 방향이 바로잡힐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람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라 걷기 시작합니다.
'신약 말씀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갈라디아서 - 아브라함의 믿음, 그리고 우리의 착각 (1) | 2026.02.21 |
|---|---|
| 갈라디아서 - 헛된 괴로움에 대하여 (0) | 2026.02.19 |
| 에베소서 -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신 성령 (0) | 2026.02.18 |
| 산상수훈 - 더 이상 도륙하지 말라, 완성된 것을 완성하라고 강요하지 말라 (0) | 2026.02.18 |
| 빌립보서 - 그리스도 예수의 일 (0) | 2026.0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