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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

갈라디아서 - 아브라함의 믿음, 그리고 우리의 착각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2. 21.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6~10)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병을 앓다가 마침내 명의를 찾아갔습니다. 의사는 정밀 검사를 마친 후 처방전을 건네며 말합니다.
"이 약을 드시면 낫습니다." 환자는 처방전을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는 약을 먹는 대신 처방전을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두고, 매일 아침 그 앞에 서서 처방전의 내용을 열심히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성분명을 달달 외우고, 복용법을 메모하고, 그 의사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 이웃에게 설명하고 다녔습니다. 몇 달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아팠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처방전을 아는 것과 약을 먹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이 이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믿음을 말하면서도 사실은 우리 자신의 열심과 행위와 노력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으려 합니다. 그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치열하게 싸우며 붙든 진리는 바로 이 착각을 정면으로 부수는 것이었습니다.

이야기는 아브라함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어느 날 밤 아브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하늘을 올려다보게 하셨습니다.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 아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 자손이 저 별들처럼 많아질 것이다." 그때 아브람의 나이는 이미 많았고, 아내 사라의 몸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그 약속은 불가능한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그 말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사건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치기 훨씬 전의 일입니다. 이삭이 태어나기도 전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할례도 받기 전이었고, 율법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그대로 믿었을 뿐인데, 하나님은 그것을 의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바로 이 지점을 정확하게 겨냥한 것입니다. 의는 행위 이전에, 율법 이전에, 인간의 어떤 조건보다 먼저 믿음으로 정해졌다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많은 사람이 야고보서를 꺼내 듭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고 죽은 것"이라는 말씀 말입니다. 야고보는 심지어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바치는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면 바울과 야고보는 서로 모순되는 말을 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이삭을 제단에 바치는 행위는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아브라함이 그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의지력이 강해서도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분임을 믿었습니다.

이삭이 죽어도 하나님이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 아니 이삭이 없어져도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 믿음이 칼을 드는 손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행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행한 것입니다.

야구선수가 홈런을 쳤을 때 우리는
"그 선수가 홈런을 쳤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오랜 훈련과 근육과 배트가 함께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의 근원에는 야구를 향한 그의 헌신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의 행함은 믿음이라는 뿌리에서 자연스럽게 솟아 나온 열매였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의 말은 바울의 말과 충돌하지 않습니다. 둘 다 같은 믿음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교회 안에서 믿음이라고 불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일마다 빠지지 않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 새벽기도를 열심히 드리는 것, 헌금을 빠짐없이 내는 것, 봉사활동에 솔선수범하는 것, 이런 행위들이 믿음의 척도가 되어 있습니다. 교회에 오래 다닐수록 이 기준은 더욱 촘촘해집니다. 어느새 신앙생활은 성적표가 되고, 사람들은 자신의 열심으로 하나님께 점수를 따려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한 학생이 교수에게 인정받기 위해 매일 도서관에서 가장 일찍 공부를 시작하고 가장 늦게까지 남아 있었다고 합시다. 교수가 지나갈 때마다 바른 자세로 앉아 열심히 공부하는 척했습니다. 하지만 시험을 앞두고 그는 불안했습니다. 자신이 진짜로 내용을 이해했는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이 이와 비슷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지런히 보이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늘 불안합니다.
"이 정도면 충분한가? 내가 구원받을 수 있을까?"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어리석다"고 강하게 말한 것은 그들이 나쁜 사람들이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율법을 지키려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율법으로 의로움을 얻으려는 시도 자체가 스스로 저주 아래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요구하는 것은 "모든 일을 항상" 행하는 것인데, 그것을 완전하게 해낼 수 있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완전한 이행을 요구합니다. 99퍼센트를 지켜도 1퍼센트를 어기면 그것은 율법을 어긴 것입니다. 마치 댐이 99퍼센트 막혀 있어도 1퍼센트의 균열이 있으면 결국 무너지는 것처럼, 율법 앞에서 인간은 결코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게을러서가 아닙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율법의 완전한 요구를 채울 수 없는 인간의 한계 때문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사다리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의롭지 못한지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반면에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 복은 아브라함에게 미리 전해진 복음, 곧 하나님의 약속에서 옵니다.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을 통해 복을 받을 것이라는 그 약속은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브라함의 믿음과 같은 믿음이고, 그 믿음이 의로 정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까?" 이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아닙니다. 믿음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무언가를 해야 하나님께 인정받는다는 생각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릅니다.

봄이 되면 씨앗은 땅 속에서 싹을 틔웁니다. 씨앗이
"이제 싹을 틔워야겠다"고 결심해서 싹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이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믿음 안에는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은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습니다. 하지만 그 열매로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거나 하나님께 점수를 따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믿음의 길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믿음은 내 열심에 초점을 두지 않게 합니다. 대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의 행위에 온 마음을 집중하게 합니다. 나의 착함도, 나의 열심도, 나의 지식도 의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이 우리의 의가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받아 누릴 뿐입니다.

명의의 처방전을 받아 든 환자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입니다. 그 약을 믿고 먹는 것입니다. 처방전을 외우는 것도 아니고, 병원을 열심히 드나드는 것도 아니고, 의사의 훌륭함을 이웃에게 설명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열심히 쌓은 행위 더미가 아닙니다. 그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을 그대로 믿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별 헤아릴 수 없는 밤하늘 아래서 하나님의 약속을 그대로 믿었던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 앞에서 그 사랑과 능력을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당신의 믿음이 좋은지 나쁜지 재지 마십시오. 그 저울 위에서는 불안과 염려만 자랍니다. 대신 눈을 들어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행하셨는지를 바라보십시오.

그 바라봄이 믿음이고, 그 믿음이 의입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복음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 복음 안으로 걸어 들어갈 차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