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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

갈라디아서 - 헛된 괴로움에 대하여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2. 19.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갈라디아서 3:4~5)

어느 날 한 사람이 오랫동안 무거운 짐을 지고 산을 오르다가 마침내 정상에 도달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누군가 그에게 다가와 말했습니다.
"이 산이 아닌데요. 당신이 가야 할 곳은 저쪽 산입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순간 멈칫했습니다. 그리고 이내 다시 짐을 챙겨 새로운 산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감내한 그 모든 고생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그 괴로움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요?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던진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이 물음은 책망이기 이전에, 깊은 안타까움입니다. 그 괴로움이 진짜였다면,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었는지를 알았더라면, 지금과 같은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안타까움입니다.

우리는 흔히 그림자를 실체로 착각합니다. 벽에 드리운 나무의 그림자를 보고 그것이 나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영역에서는 이 착각이 매우 자연스럽게, 그리고 매우 오랫동안 지속됩니다.

구약의 율법, 절기, 제사, 안식일은 모두 그림자입니다. 실체인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그림자입니다. 어두운 방에 촛불을 켜면 벽에 그림자가 생깁니다. 그 그림자는 촛불이 있기에 존재합니다. 촛불이 꺼지면 그림자도 사라집니다. 중요한 것은 촛불이지, 그림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촛불보다 그림자에 더 집중합니다. 그림자를 열심히 붙잡으면 촛불을 더 가까이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주일에 빠짐없이 예배를 드리고, 십일조를 성실하게 내고, 새벽기도에 참석하고, 봉사 활동에 헌신하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하나님께 나를 의롭게 보이게 하는 수단이 된다고 믿을 때입니다. 그것이 그림자를 실체로 착각하는 순간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많은 괴로움'은 무엇일까요? 복음을 처음 들었을 때의 그 순간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말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할 때, 사람은 불가피하게 자기 자신과 마주하게 됩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 내 안에 선함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실제로는 얼마나 얕은 것인가 하는 자각, 그리고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서 내가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 하는 인식이 밀려옵니다. 이것이 괴로움입니다.

어느 신학자는 이런 고백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경건한 신앙인으로 살았지만, 어느 날 기도 중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가 실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의로움을 확인하기 위한 행위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의 무너짐, 그 수치와 공허함, 그것이 바로 복음이 주는 괴로움입니다. 자기가 쌓아온 것들이 하나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는 그 고통입니다.

이 괴로움은 사람을 어디로 데려갑니까? 율법으로 데려가지 않습니다. 더 열심히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데려가지 않습니다. 오직 십자가 앞으로 데려갑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곳, 그리스도의 피만이 닿을 수 있는 그곳으로 사람을 밀어 넣습니다. 그것이 괴로움의 의미입니다. 괴로움이 헛되지 않다면, 그것은 반드시 십자가를 향하게 됩니다.

인류의 이야기는 에덴에서 시작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을 때 그들이 얻은 것은 무엇입니까?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비극의 시작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인간은 스스로 선을 규정하고, 그 선을 따르는 것이 의롭다고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종교의 기원입니다. 더 선한 것, 더 거룩한 것을 스스로 규정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 그것이 인간의 종교심입니다. 그리고 기독교도 이 종교심의 틀 안에 갇히는 순간, 복음을 잃어버립니다.

어떤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매일 아침 성경을 읽고, 교회 봉사에 헌신하며, 이웃을 돕는 삶을 살았습니다. 누가 보아도 훌륭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내면에는 늘 불안이 있었습니다.
'내가 충분히 하고 있는 걸까?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실까?' 그 불안이 그녀를 더 열심히 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그 열심이 오히려 그녀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했습니다. 그녀가 의지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탄식하는 이유입니다. 그들은 성령으로 시작했습니다. 복음을 듣고, 십자가 앞에 섰고, 자신의 무력함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다시 행위로 돌아갔습니다. 자신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그 강렬한 종교적 본능 앞에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붙잡아야 할 진실이 있습니다. 믿음조차도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흔히 우리는
"믿기로 결심했다"고 말합니다. 마치 믿음이 의지의 산물인 것처럼, 내가 선택하면 가질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죄인인 인간이 십자가를 진정으로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감정이나 이성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죽은 사람이 스스로 일어날 수 없는 것처럼, 죽음 아래 있는 인간이 생명의 근원이신 그리스도를 향해 스스로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묻습니다. "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성령이 오신 것, 능력이 행해진 것, 믿음이 생겨난 것,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입니다. 나의 열심이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씨앗이 싹을 틔우는 과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농부는 씨앗을 심고 물을 줍니다. 그러나 씨앗 안에서 생명이 움트는 일, 뿌리가 땅속으로 뻗어나가는 일, 줄기가 빛을 향해 자라나는 일, 이것은 농부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농부가 아무리 능숙해도, 아무리 열심히 해도, 생명 자체를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생명은 오직 생명으로부터 옵니다.

믿음도 그러합니다. 그것은 성령이 심으시고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된 사람은 자신의 행위로 믿음을 증명하려는 욕구에서 벗어납니다. 이미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충만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우리를 채운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충만하다고 하는데 우리는 왜 늘 부족한 느낌을 받을까요? 왜 더 해야 한다는 강박이 사라지지 않을까요?

그것은 충만함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몸으로는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그 충만함이 내 행위와 관계없이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받은 것을 공짜로 갖는 것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무언가를 받으면 돌려줘야 한다는 감각, 빚진 것을 갚아야 한다는 감각이 우리를 행위로 내몹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가 갚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로 죽은 우리를 살리신 사랑입니다. 죽은 자가 무엇으로 은혜를 갚을 수 있겠습니까? 살아난 것 자체가 이미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우리가 무언가를 더함으로써 더 완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어떻게 살아갑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방향이 다릅니다.
성도가 날마다 경험하는 것은 자신의 죄입니다. 더 나아진 자신이 아니라, 여전히 부족하고 실패하고 무너지는 자신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십자가를 다시 봅니다. 이 죄인을 위해 그리스도가 피를 흘리셨다는 것을, 이 실패한 자를 위해 하나님이 아들을 내어 주셨다는 것을 다시 확인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점점 더 의로워지는 삶이 아니라, 점점 더 십자가 앞에 깊이 서게 되는 삶입니다. 죄를 볼수록 은혜가 더욱 선명해지는 역설의 삶입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칩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보여주는 것은 선한 행위가 아닙니다. 성도가 보여주는 것은 이 죄인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능력은 죄인을 선인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은혜를 아는 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산을 오른 사람에게, 이 산이 아니라는 말은 가혹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를 위한 진실입니다. 잘못된 산에서 내려와 진짜 산으로 향하게 하는 진실입니다.

바울의 질문도 그렇습니다.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이것은 그 괴로움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괴로움이 진짜였다면, 그것이 당신을 어디로 이끌었어야 하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는 자는 자기 죄로 인해 괴롭습니다. 그 괴로움은 헛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은혜를 향한 문입니다. 그러나 그 괴로움을 경험하고도 다시 행위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그 괴로움의 의미를 스스로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산을 절반쯤 올라가다가 다시 평지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십니다. 십자가를 보게 하시고, 죄를 보게 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넘치는 은혜를 보게 하십니다. 그 보임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돌아갈 곳은 더 많은 행위가 아닙니다. 더 깊은 십자가입니다. 괴로움이 헛되지 않으려면, 그 괴로움은 반드시 십자가 앞에 내려놓여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 은혜가 시작되고, 그 은혜 안에서 성도는 자기 일이 아닌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을 살아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