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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

고린도전서 - 선택한 믿음인가, 선택받은 믿음인가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12. 17.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린도전서 1:4~9)

우리는 흔히 복음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셨다.” 그리고 이 복음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각자의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시각에서 기독교인은, 여러 종교적 선택지 가운데 예수를 구원자로 ‘선택한 사람’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는 스스로 예수를 선택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예수께서 나를 찾아오신 사람입니까. 이 질문은 단순한 표현의 차이가 아니라, 기독교가 진리인가 종교인가를 가르는 기준이 됩니다.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이렇게
말합니다. “
내가 예수를 선택했고, 내가 믿었고, 그래서 구원받았다.” 그러나 진리로서의 기독교는 정반대로 고백합니다. “예수께서 나를 선택하셨고, 나를 부르셨으며, 나를 구원하셨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서두에서 이미 이 방향을 분명히 합니다. 그는 고린도 교회를 가리켜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성도는 스스로 성도가 된 존재가 아닙니다. 먼저 부르심을 받은 자입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의 결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게 된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뜻을 모아 만든 종교 공동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으로 생겨난 공동체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자신의 뜻과 공로와 행함을 가치 없는 것으로 내려놓은 자리에서 나오는 고백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리로서의 기독교가 서 있는 자리입니다.

인간의 사랑과 하나님의 구원은 다릅니다. 여기서 우리는 불편한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만일 구원이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에 달려 있다면, 하나님은 애초에 모든 사람을 구원할 계획을 가지신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신의 모습은 대개 이렇습니다. “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 예수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정말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원하신다면, 왜 그들이 믿도록 역사하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인간 중심적인 대답이 바로 자유의지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믿고 안 믿는 것은 인간의 선택이다.” 이 주장은 논리적으로는 그럴듯합니다. 하지만 성경적이지는 않습니다. 인간의 사고에는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으로 만들어진 설명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성도를 “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부르신 자를 끝까지 붙드시는 분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8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하나님은 부르셨다가 인간의 행함을 보고 구원을 취소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 말이 특히 놀라운 이유는, 고린도 교회가 문제가 매우 많은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파벌이 있었고, 윤리적 타락이 있었고, 은사로 인한 차별과 교만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본다면 “
과연 이게 교회인가?”라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교회를 향해, “너희는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죄를 가볍게 여긴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더 깊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
너희는 도대체 무엇을 믿고 있느냐?” 교회의 문제 앞에서 가장 쉬운 태도는 누가 옳고 누가 틀렸는지를 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통해, 각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향해 질문하게 합니다.

나는 무엇을 믿고 있는가?” 고린도 교회의 구원이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신앙 수준이 높아서가 아닙니다. 구원의 조건이 그들에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구원의 조건이 인간에게 있었다면, 고린도 교회는 이미 탈락했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조건을 제거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조건을 기준으로 하지 않습니다. 만일 어떤 조건이 구원의 기준이 된다면, 그것은 결코 공평할 수 없습니다. 기도가 조건이라면, 기도할 수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건강, 환경, 지적 수준, 신앙 교육의 차이는 어떻게 설명합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조건 없는 구원의 방식, 곧 십자가를 선택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
너의 행함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이 전부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나에게서 나오는 그 어떤 행함에도 가치를 두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십자가를 믿는다 하면서도 자신의 행함을 믿음의 증거로 삼는다면, 그것은 매우 교묘한 위선이 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
행함이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믿음의 증거는 된다.” 하지만 이것은 깊이 생각해 보면 모순입니다. 믿음이 오직 은혜로 주어진 것이라면, 믿음은 인간의 행함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은 스스로 증거를 만들어냅니다. 그 증거는 더 나은 나의 모습이 아니라,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반복해서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그 완성의 세계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 안에서는 더 이룰 것이 없습니다. 더 보탤 것도, 더 증명할 것도 없습니다. 그 안에 있는 모든 신자는 동일한 은혜를 누립니다. 높고 낮음도, 우열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안의 세계는 복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과 공로를 보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잘했느냐 못했느냐는 더 이상 결정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바로 이것을 잊어버린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은사를 자기 능력으로 착각했고, 비교했고, 자랑했고, 분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은사는 자랑이 아니라 기다림을 위한 도구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은혜 자체가 감사가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린도 교회가 완벽해서가 아닙니다. 문제가 없어서도 아닙니다.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지, 어떤 은사를 가졌는지와 상관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미 복된 자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그 예수 안에 끝까지 견고하게 붙들어 두시기 위해 오늘도 일하십니다. “
너의 힘으로 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오직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라.” 이것이 고린도전서 1장 4~9절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복음의 핵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