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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

산상수훈 - 화평케 하는 자의 길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12. 17.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9)

우리는 “
화평케 하는 자”라는 말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한 장면을 떠올립니다. 갈등의 한복판에서 양쪽의 손을 잡아 주는 사람, 거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 사람, 누구와도 싸우지 않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착한 그리스도인’. 그래서 산상수훈을 읽고 나면 이런 결론에 쉽게 이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피스메이커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너무 쉽게 받아들인 이 정의를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무너뜨립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
화평케 하는 자”는 인간적인 성품의 문제도, 도덕적 성취의 결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산상수훈은 보편 윤리가 아니라, 복음을 통과한 자에게서만 나타나는 삶의 결과입니다.

대표적으로 우리는 마하트마 간디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는 산상수훈을 사랑했고, 비폭력과 무저항을 실천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
화평케 하는 자”였을까요?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화평은 성경이 말하는 화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화평은 ‘
상태’가 아니라 ‘인격’입니다. 성경에서 화평, 평강, 샬롬은 사람이 만들어내는 심리적 안정이나 사회적 합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언제나 한 분의 인격으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 될 것이라.” “그의 이름은 평강의 왕이라.”

성경은 반복해서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평강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평화란 어떤 분위기가 아니라, 예수께 속한 실재입니다. 예수가 빠진 평화는 보기에는 아름다울지 몰라도, 성경적 의미에서의 화평은 아닙니다.

화평은 이미 ‘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성경은 화평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분명히 밝힙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화평은 인간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이상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이미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화평의 방향은 언제나 수직에서 수평으로 흐릅니다.

먼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의 화목이 이루어지고, 그 결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변합니다. 이 순서가 바뀌는 순간, 화평은 윤리로 전락하고 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평화는 언제나 임시적이며, 언제든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
화평케 하는 자”는 누구인가? 마태복음 5장 9절에 사용된 ‘화평케 하는 자’라는 단어는 성경 전체에서 단 두 번만 등장합니다. 한 번은 이 말씀에서, 또 한 번은 골로새서 1장 20절에서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두 본문 모두 십자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란, 사람들을 착하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갈등을 잘 중재하는 능력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십자가에서 이미 죽임당한 사람입니다.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화평은 내가 여전히 살아 있는 상태에서 흘러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삭제된 자리, 내 주권이 내려놓아진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왜 죽음이 화평인가? 인간의 타락은 단순히 도덕적 실패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하도록 지음 받은 존재가, 스스로 주인이 되려 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주체성, 자율성, 자기 의를 붙들고 있는 한, 참된 화평은 불가능합니다.

화평이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항복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이 말씀은 부드러운 초청이 아닙니다. “너를 죽이겠다”는 선언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죽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고, 그 통치가 곧 평화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분쟁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아느냐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이 말씀은 앞선 화평의 선언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세상이 원하는 평화는 ‘내가 안전한 상태’이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는 ‘내가 주인이 아닌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평화의 근거로 삼고 있는 것들인 가족, 돈, 명예, 관계를 때로는 찢어내십니다. 그 과정은 분쟁처럼 느껴지고, 고난처럼 체감됩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하늘의 평화가 역사 속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하나님의 아들은 본래 예수 한 분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안에서 양자로 입적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무언가를 잘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철저히 부정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평케 하는 자란, 예수처럼 하나님의 뜻에 의해 끌려가며 살아가는 자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실제화해 가는 자입니다.

화평은 느낌이 아니라 십자가의 결과입니다. 평화는 내 뜻이 이루어질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장악될 때 시작됩니다. 성도의 평화는 종종 고난의 얼굴로 다가옵니다. 내가 점점 사라질수록, 하나님은 더 분명히 아버지가 되십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삶 자체가, 예수께서 말씀하신 “
화평케 하는 자”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