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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

산상수훈 - 핍박도 복인가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12. 24.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태복음 5:10~12)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예수님의 이 선언은 처음 들으면 당혹스럽습니다. 핍박이 복이라니, 고통이 어떻게 복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산상수훈의 팔복은 처음부터 우리 상식과 충돌하는 말씀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이 모든 조건은 세상이 말하는 ‘성공’이나 ‘복된 삶’과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모든 선언을 이렇게 감싸 안으십니다. “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처음과 끝이 똑같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히브리적 문학 구조, 이른바 ‘샌드위치 구조’입니다. 중심 메시지를 양쪽에서 동일한 표현으로 감싸 강조하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팔복 전체를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너희가 천국이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말은 소유 개념이 아니라 존재 선언에 가깝습니다. “천국이 너희에게 주어진다”가 아니라 “너희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다”라는 뜻입니다.

천국은 장소가 아니라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입니다. 그러므로 “
너희가 천국이다”라는 말은 “너희는 하나님의 통치에 완전히 사로잡힌 자들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자들의 삶의 모습이 바로 이 팔복에 등장하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 애통한다. 온유하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 긍휼히 여긴다. 마음이 청결하다. 화평케 한다. 그리고 마침내 핍박을 받는다." 이것이 천국 백성의 역사 속 현실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독특한 존재입니다. 이미 묵시 속에서는 완성된 존재지만, 아직 역사 속에서는 진행 중인 존재입니다.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하늘의 나라와 이 땅의 역사가 겹쳐졌습니다. 완성된 천국과 깨어진 세상이 한 사람의 삶 안에서 동시에 존재합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늘 긴장 속에 있습니다.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지만, 여전히 죄의 몸을 입고 삽니다. 하나님의 자녀지만, 아직 완전히 새로워지지 않았습니다. 이 긴장이 바로 팔복의 자리입니다. 팔복은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이 아닙니다. 천국 백성이 이 땅에서 살아갈 때 반드시 겪게 되는 현실에 대한 설명입니다.

천국에 가면 더 이상 애통하지 않습니다. 의에 주리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자들은 오히려 이 땅에서 더 깊은 결핍을 경험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안에서 나오는 선이 없다는 사실을
점점 더 분명히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핍박”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디오코는
단순히 맞고 욕먹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쫓기다, 몰리다, 추적당하다입니다. 그리고 이 본문에서는 수동태로 쓰입니다. “핍박을 당하는 자들.” 이 말은 곧 성도의 삶에서 일어나는 많은 고난과 압박이 우연이나 인간의 악의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추격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목자가 양을 몰 듯,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정해진 목적지로 밀어 가십니다. 그 과정에서 양은 불편함을 느낍니다. 원치 않는 방향으로 끌려가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추격은 파괴가 아니라 구원입니다. 그래서 핍박은
성도의 삶에서 없어도 되는 옵션이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필수 과정인 것입니다.

이 핍박은 먼저 내부에서 시작됩니다. 성도는 두 마음을 가지고 삽니다. 새 마음과 옛 마음, 성령이 주신 마음과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마음, 사도 바울은 이것을 로마서 7장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마음의 법과 싸운다.” 이 싸움은 모든 성도 안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싸움을 쉽게 끝내주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이 싸움 속에서만 우리는 진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탄식이 바로 심령의 가난입니다. 애통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름입니다. 그리고 이 탄식은 반드시 한 방향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유일한 열매입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떠나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는 것입니다.

왜 세상은 성도를 미워하는가?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 “나를 인하여 핍박을 받을 때에 복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의는 사람들이 칭찬하는 의가 아닙니다. 도덕적 모범이나 사회적 공헌이 아닙니다. 그 의는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세상은 인간의 의를 사랑합니다. 사람의 노력, 헌신, 희생을 칭찬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자존심을 살려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
나는 전적으로 무능하며 내 안에는 의가 없다” “나의 구원은 오직 예수의 의뿐이다” 라고 고백하는 순간, 세상은 불편해집니다. 그 고백은 모든 인간의 자율성과 자존심을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칭찬하는 신앙은 성경적으로 매우 위험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핍박은 천국의 표지입니다. 핍박은 실패의 증거가 아닙니다. 신앙이 잘못되었다는 증거도 아닙니다. 오히려
천국이 이미 그 사람 안에 임했다는 표지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면 옛 통치는 반드시 저항합니다. 내 안의 아담이 저항하고, 세상의 가치가 저항합니다. 그래서 충돌이 생깁니다. 그 충돌의 이름이 핍박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왜냐하면 그 핍박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핍박을 통해 자신을 잃고, 자신을 잃음으로 예수를 얻습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비로소 알게 됩니다. 핍박도 복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