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디모데후서 1:9~10)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마음 한구석에 늘 비슷한 고민을 품곤 합니다. “이렇게 살아도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예배에 빠지면 안 될 것 같고, 기도에 소홀하면 하나님께 멀어진 느낌이 들고, 성경 읽기가 조금 늦어지기라도 하면 영적 상태가 나빠졌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어떤 때는 묘한 자신감이 밀려오기도 합니다. 예배도 빠지지 않고, 봉사도 열심히 하고, 전도도 한 두 번 했다고 생각되면 왠지 하나님 앞에 조금은 당당해지는 것 같습니다. 남들보다 그래도 ‘조금은 더 믿음 있는 사람’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두 마음인 불안함과 당당함은 서로 반대처럼 보이지만 놀랍게도 동일한 뿌리를 갖고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행위에 구원을 걸고 있는 마음입니다. 하나는 행위가 부족하니 불안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행위가 어느 정도 되니 안심하는 것입니다. 둘 다 결국 복음 밖에서 생기는 마음입니다.
행위가 만든 믿음이 아니라, 은혜가 우리를 붙드십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말은 우리가 믿음이 괜찮아서, 또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서 선택받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원 전부터 시간이 생기기도 전에, 세상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 하나님은 이미 교회를 계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 속에 당신의 이름을 새기셨습니다. “부르심”이라는 단어는 이름 짓다, 초대하다, 불러낸다는 뜻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존재를 하나님의 집 안에 배치해 두셨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우연히 믿게 된 자가 아닙니다. 어떤 선택의 순간에 “내가 결단했기 때문”에 믿는 것도 아닙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신앙생활의 무게가 확 달라집니다. 신앙은 “내가 만들어 가는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준비해 두신 은혜 안에서 걷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은 죽음의 그늘이 사라지는 순간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사망을 폐하시고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셨다.”(딤후 1:10)
여기서 “폐하시다”라는 말은 그냥 죽음을 ‘무시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원어의 뜻은 “활동을 멈추게 하다, 쓸모없게 만들다, 치워버리다.” 예수님의 오심은 죽음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두려움에 떨며 살아가던 인류에게 그 벽을 완전히 무너뜨리신 사건입니다.
죽음이 우리를 더 이상 주장하지 못합니다. 죽음이 마지막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오셨다는 사실은 우리 안으로 생명이 들어오고, 우리를 감싸던 썩어짐과 멸망할 것들이 점점 힘을 잃어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신앙 가운데 겪는 모든 갈등, 죄의 흔적, 연약함, 실패, 낙심…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 없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죽음에서 생명으로 갈지도 모른다”라고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입니다.
복음 안에 ‘두신’ 자리는 고난조차도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1:11) “세우심”이라는 말은 그저 직분을 맡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알맞은 자리에 배치해 두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자신의 역사 안에, 복음의 흐름 속에 가장 정확한 자리에 놓아두십니다. 그리고 바울은 감옥 안에서 말합니다.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1:12) 왜 부끄럽지 않은가? 왜 억울하지 않은가? 왜 절망하지 않는가? 그 답은 단순합니다.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내가 의탁한 것을 그가 능히 지키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라.”
바울이 신뢰한 것은 자신의 사도적 성취나 신앙의 열심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붙든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이 시작하신 복음은 하나님이 끝까지 책임지신다는 확신입니다. 그 확신이 수치의 자리도 은혜의 자리로 바꾸고, 고난의 자리도 사명의 자리로 바꾸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불안해하지 말라 - 천국은 행위의 점수로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당신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 배치된 자입니다. 당당해하지도 말라 - 우리를 의롭게 하신 근거는 내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뜻과 은혜입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 그 자리도 하나님이 당신을 ‘놓아두신 자리’일 수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복음이 더 또렷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복음이 당신을 지킨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 내가 복음을 붙든 것이 아니라 복음이 나를 붙듭니다. 하나님이 그날까지 반드시 당신을 지키십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이라는 한 문장은 성경 전체, 은혜 전체, 구원 전체를 요약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오셨기에 죽음은 사라지고, 생명이 드러나고, 성도가 생명을 붙들고 살아갈 길이 열린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내가 얼마나 잘하는가의 싸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뤄 놓으신 생명 안에서 그 은혜를 ‘발견해 가는 여행’입니다. 오늘도 그 은혜 안에 머무르십시오. 하나님은 이미 당신을 가장 적절한 자리에 두셨고, 그날까지 당신을 지키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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