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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 - 신앙의 시작점, 이미 받은 상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3. 9.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린도전서 3:8~9)

어떤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봄마다 씨를 뿌리고 여름내 물을 주었습니다. 가을이 되어 황금빛 들판이 펼쳐지면 사람들은 그를 칭찬했습니다.
"저 농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삽니다." 농부는 처음에는 손사래를 쳤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그 칭찬이 싫지 않았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씨를 뿌릴 때마다 마음속으로 계산했습니다.
'올해 내가 심은 것이 저 사람보다 많다. 물을 더 많이 주었다. 그러니 나의 몫이 더 커야 한다.' 그러나 그 가을에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그가 심고 물을 준 밭은 모두 떠내려갔습니다. 반면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언덕배기 한 귀퉁이에서 묵묵히 자라던 보리는 물이 빠진 뒤에도 꿋꿋이 서 있었습니다. 그 겨울, 농부는 오랫동안 그 보리를 바라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이 한 문장에 신앙의 방향이 담겨 있습니다. 신앙은 인간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출발점이 되는 순간,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종교가 됩니다. 종교는 인간이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 신을 이용하는 체계입니다. 반면 신앙은 하나님이 먼저 움직이시고, 인간은 그 움직임 안에 놓여지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는 바울에게 속했다", "나는 아볼로에게 속했다"며 사람을 중심으로 편을 갈랐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파벌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그 안에는 더 깊은 전제가 숨어 있었습니다. '신앙이란 탁월한 사람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생각, '더 뛰어난 지도자를 따르는 것이 더 높은 신앙'이라는 착각이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육의 사람'의 사고방식입니다. 육의 사람은 모든 것을 인간의 능력과 업적으로 환산합니다. 성령조차도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더 잘 수행하도록 돕는 보조 수단쯤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성령이 하시는 일은 정반대입니다. 성령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의 무능함을 직면하게 합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성령이 먼저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이 굴욕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서본 사람은 압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알 때 비로소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게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심는 자도 물 주는 자도 아무것도 아니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라는 고백은 패배의 언어가 아니라 해방의 언어입니다.

바울은 8절에서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자연스럽게 세상의 언어로 번역합니다. '일한 만큼 받는다. 많이 한 사람이 더 받는다. 그러니 더 열심히, 더 많이 해야 한다.' 그러나 이 번역은 틀렸습니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나님 자신이 아브라함의 상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주어질 때 아브라함이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해낸 직후였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믿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실패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아내를 두 번이나 다른 남자에게 넘기고, 약속의 아들을 기다리지 못해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의 상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상이 아브라함의 행위와 아무 관계가 없다는 선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그 상의 완성이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사망은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악한 세력이 공격해도 그리스도의 의가 방패가 됩니다. 이것이 상입니다. 영생이 상입니다. 그리고 이 상은 이미 주어졌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평생 교회의 대소사를 섬겼습니다. 새벽마다 와서 예배당을 쓸고, 겨울에는 보일러를 켜고, 여름에는 화장실을 닦았습니다. 그가 받을 상이 설교를 하고 성경을 가르친 목사보다 적어야 합니까? 바울의 논리를 따르면, 그렇지 않습니다.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나 모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라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면, 심은 양이나 물 준 양이 상의 크기를 결정하지 못합니다. 상은 동등합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상은 하나입니다. 그 하나의 상이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바울은 9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라고 말합니다. 동역자란 함께 일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얼마나 놀라운 말인지 우리는 둔감하게 지나칩니다.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비유를 떠올려 보십시오. 이른 아침에 나간 주인이 장터에 서 있는 품꾼들을 불러들입니다. 제삼시, 제육시, 제구시, 심지어 제십일시에도 나갑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포도원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인이 먼저 나와 그들을 찾았습니다. 주인이 불렀습니다. 그 부름이 없었다면 그들은 끝까지 장터에 서 있었을 것입니다. 품삯을 받기 전, 일을 시작하기 전, 이미 은혜는 부름 받는 순간 시작되었습니다.

바울 역시 그랬습니다. 그는 스스로 동역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그는 교회를 핍박하러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를 동역자의 자리에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었습니다. 바울이 동역자가 된 것은 그의 자질이나 열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부름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동역자로 부름 받았다는 것이 곧 상인 것입니다. 일을 마친 후 받는 포상이 아니라, 일을 시작하기 전 이미 받은 존귀함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함께 있게 되었다는 것, 하나님의 밭에서,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곁에서 목도하게 되었다는 것이 성도의 지위인 것입니다.

목사가 강단에서 설교하는 것, 권사가 새벽에 교회 문을 여는 것, 청년이 아이들 앞에서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집사가 성도들의 밥을 짓는 것,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동역자로 하나님의 집에서 하는 일입니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라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역할이란 그 하나님의 일하심 앞에서 모두 동등하게 작고, 동등하게 귀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상을
'앞으로 받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더 기도해야, 더 봉사해야, 더 헌신해야 언젠가 하나님이 갚아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거래입니다. 하나님을 채권자로, 자신을 채무자로 만드는 구조입니다.

성도는 상을 받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상을 받은 자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영생을 받았습니다. 사망이 더 이상 마지막이 아닌 세계에 이미 들어와 있습니다. 이 상을 알면, 세상의 것이 있고 없고는 존재의 핵심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성도가 오랫동안 가난했습니다. 원하는 것을 거의 이루지 못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상하게도 초조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이미 제일 좋은 것을 받았거든요." 그 말 한마디가 설교보다 웅장했습니다. 그는 상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조건이 그를 가난하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세상의 풍요를 다 누리면서도 항상 불안하고 무언가 더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상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상을 앞에 두고 있으면서 상을 쫓아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세상 것이 있든 없든 결국 가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입니다. 차이는 역할에 있을 뿐, 가치에 있지 않습니다. 자라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로, 하나님의 밭에서, 하나님의 집 안에서 삽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상입니다. 이 상은 이미 주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