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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

고린도전서 - 십자가 앞에서 무너지는 지혜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 11.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린도전서 1:19~21)

저녁 무렵, 높은 곳에 올라 도시를 내려다보면 붉은 십자가들이 어둠 속에서 빛납니다. 하나의 건물 위에 두 개, 세 개의 십자가가 서 있는 풍경은 이제 낯설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면 모두 같은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경쟁과 비교, 보이지 않는 다툼이 공기처럼 흐르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같은 복음을 말하지만 서로를 형제로 여기기보다는, 누가 더 잘되는지, 누가 더 영향력이 있는지를 의식하며 살아갑니다.

이 모습은 고린도 교회의 모습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쟁과 분파를 단순한 성격 문제나 조직 운영의 실패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뿌리를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로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인간의 모든 기준과 자랑을 무너뜨리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언제나 갈등이 생깁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누군가는 말합니다.
“기도하면 분쟁이 사라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기도를 아무리 강조해도 분쟁은 반복됩니다. 그 이유는 분쟁의 원인이 기도의 부족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인정받고, 우월해지고 싶어 합니다. 이 본성이 그대로 살아 있는 한, 분쟁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세례를 받은 사실마저도 자기 자랑의 도구로 삼았습니다.
“나는 바울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나는 아볼로에게서 받았다”고 말하며 은근히 자신을 높였습니다. 세례가 무엇입니까. 세례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고, 오직 그리스도께 속한 존재가 되었음을 선포하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 거룩한 고백이 자기 가치를 높이는 장식품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구원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는 인간이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위대한 승리자가 아니라, 철저히 무능해 보이는 패배자처럼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능력 있는 메시아를 기대했지만, 십자가는 그 기대를 완전히 배반했습니다.

우리는 은근히 믿음을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신앙이 깊어지면 삶이 편해지고, 인정받고, 존중받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런 기대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을 높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존재인지, 얼마나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착각하는 존재인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세상의 지혜로는 결코 이해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지혜는 언제나
“나에게 무엇이 유익한가?”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인간의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을 드러냅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방식입니다. 바로 이 점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고 자랑할 수 없는 방식으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누구도 “내가 십자가를 선택했다”고 말할 수 없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전도를
“미련한 것" 이라고 표현합니다. 전도는 사람을 설득하는 기술이 아닙니다. 말 잘하는 사람, 논리적인 사람, 감동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설득으로 사람이 바뀐다면, 하나님은 가장 뛰어난 웅변가들만 사도로 세우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조차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충돌만 일으켰습니다.

복음은 언제나 충돌을 일으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인간의 본성을 정면으로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욕망을 내려놓고 십자가를 따른다는 것은 설득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십자가의 도를 믿고, 그 앞에서 자신을 부인하게 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믿음은 오히려 자기 믿음을 부인하게 만듭니다. 믿음에 있지 않을수록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고, 드러내고,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믿음보다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그래서 사람을 높이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만을 말합니다. 교회 안에서 사람이 중심이 되면 반드시 분쟁이 생깁니다. 특정 인물, 특정 지도자, 특정 신앙 스타일을 높이기 시작할 때, 십자가는 배경으로 밀려납니다. 분쟁과 분파는 십자가를 말하지만 십자가의 은혜 안에 살고 있지 않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데서 드러납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지혜자도, 변론가도, 총명한 자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모두가 동일하게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죄인일 뿐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이 말씀은
“지혜를 쓰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어차피 자기 지혜를 드러내며 삽니다. 그러나 말씀이 우리를 비출 때, 그 지혜가 얼마나 자기중심적이었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때 십자가를 바라보게 된다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인 것입니다. 자신의 무능을 알게 하고,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을 높이지 않습니다. 사람도 우월한 존재로 보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은혜만을 봅니다. 그리고 그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참된 기쁨임을 배우게 됩니다. 이것이 세상의 지혜가 결코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