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립보서 2:1~4)
교회를 오래 다니다 보면 이런 말을 자주 듣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는 사랑해야지.” “우리는 한 가족이잖아요.” 그런데 이상합니다. 가족보다 더 다투는 곳이 교회가 되기도 하고, 세상 조직보다 더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봉사, 헌신, 직분, 인정… 이름은 거룩한데 속은 점점 팍팍해집니다. 왜 그럴까요?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이 말은 단순한 도덕 권면이 아닙니다. ‘좋은 사람이 되라’는 말도 아닙니다. 이것은 복음이 사람 안에 들어왔을 때 나타나야 할 필연적인 열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말합니다. 그 말은 곧 “복음에 합당한 시민답게 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 땅에서 출근하고, 밥을 먹고, 세금을 내며 삽니다. 그러나 복음을 믿는 순간,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로 옮겨집니다. 여권은 그대로인데 국적은 바뀐 셈입니다. 그러면 삶의 기준과 방향이 달라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하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이 여전히 땅의 방식으로 살아가려 한다는 데 있습니다. 경쟁, 비교, 성과, 인정… 이것이 세상의 언어인데, 어느 순간 교회 안에서도 이 언어가 자연스럽게 사용됩니다. “누가 더 많이 봉사했는가?” “누가 더 열심히 헌신했는가?” “누가 더 영향력이 있는가?” 이 질문들이 많아질수록 교회는 점점 피곤해집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은혜를 “좋은 일이 생기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전혀 다르게 말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인생은 한결같이 고난의 연속입니다. 아벨은 은혜를 받아 의로운 제사를 드렸지만 돌에 맞아 죽었고, 모세는 애굽의 모든 보화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선택했습니다. 그들은 왜 그런 길을 갔을까요? 용기가 있어서일까요? 영웅심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들에게 은혜가 임했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우리를 편안한 길로 데려가기보다, 자기를 부인하는 길로 이끕니다. 그리고 그 길에서 가장 먼저 깨지는 것은 ‘나 중심’의 삶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성령의 역사가 분명히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권면이 있었고, 사랑의 위로가 있었고, 성령의 교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다툼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교회 안에 갈등이 있다고 해서 “여긴 문제가 있는 교회야”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믿는 순간, 우리 안에는 두 사람이 살기 시작합니다. 옛 사람과 새 사람,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 마치 한 집에 전혀 성격이 다른 두 사람이 함께 살게 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충돌이 없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조차도 바나바와 “심히 다투어” 갈라섰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인간적인 다툼조차도 사용하셔서 복음을 더 넓게 퍼지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인간의 부족함이 하나님의 일을 멈추게 하지 못합니다.
교회는 경쟁하는 곳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이미 죽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이, 무슨 경쟁을 하겠습니까? 누가 더 많이 했는지, 누가 더 앞섰는지를 따진다는 것은 아직도 ‘살아 있는 자’의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루 종일 일한 사람과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같은 품삯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을 돌보라.” 이 말은 ‘착하게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은혜의 질서를 따라 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길 수 있을까요? 억지로는 안 됩니다. 훈련으로도 안 됩니다. 의지로도 안 됩니다. 오직 한 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 안에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점점 나아가며 자신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죄인 중에 괴수” 이 고백은 겸손한 척하는 말이 아닙니다. 성령이 비추실수록, 자신의 실체가 더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지 않습니다. 비교하지 않습니다. 자랑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렇게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교회는 완벽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보다 더한 죄인은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천국의 예고편이 되는 것입니다. 서로를 눌러서 올라가는 곳이 아니라, 서로를 세워 주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남을 낫게 여긴다는 것은, 내가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커질수록, 교회는 조용해지고 관계는 깊어지고 기쁨은 충만해집니다. 이것이 복음이 우리 안에서 만들어 내는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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