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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

구약에 나타난 복음 - 부르짖음에서 시작되는 찬송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 17.

"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그러므로 그가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시편 107:4~12)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07편은 찬송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찬송은 가벼운 감정의 발로가 아닙니다. 이 시편의 찬송은 절망을 통과한 자들의 고백이며, 길을 잃어본 자들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먼저 감사하라고 말하지만, 곧바로 인간의 처절한 실존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이 시편에는 서로 다른 네 종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들은 전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인생이라는 광야를 각기 다른 모습으로 통과하는 ‘한 인간’의 여러 얼굴입니다.

“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이 첫 번째 사람들은 길을 잃은 자들입니다. 단순히 공간적인 방황이 아닙니다. 삶의 방향을 잃은 방황입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무엇을 붙들어야 할지 알지 못한 채, 주리고 목마른 영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흔히 지적인 질문을 품은 사람들입니다.
“삶이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역사와 문명, 노동과 성공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러나 인간의 지성과 사유는 끝내 이 질문에 답을 주지 못합니다. 철학은 인간의 고민을 정직하게 드러내지만, 구원의 길을 제시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사유의 끝에서 희망이 아니라 절망에 이릅니다. 술로, 쾌락으로, 혹은 냉소로 삶을 소모합니다.

그런데 시편은 그 절망의 자리에서, 그들이 마침내 여호와께 부르짖었다고 말합니다.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 길을 찾은 것이 아니라, 길이신 분을 만난 것입니다.

두 번째로 등장하는 사람들은 쇠사슬에 매인 자들입니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이들은 노예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감옥에 갇힌 사람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돈, 명예, 성공, 중독, 관계, 자기 의, 무엇이든 인간을 붙잡아 매는 것은 쇠사슬이 됩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쇠사슬이 반드시 불행을 동반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겉으로는 성공과 안정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쉼이 없습니다. 잃을까 두렵고, 유지해야 할 것이 많으며,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합니다.

시편은 그 쇠사슬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한 결과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도 길은 하나입니다.
“이에 그들이 그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들의 얽어 맨 줄을 끊으셨도다.” 인간이 쇠사슬을 끊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끊으셨습니다. 시편 107편에서 반복되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에 그들이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찬송은 언제나 이 부르짖음 뒤에 나옵니다. 다시 말해, 탄식을 건너뛰고 부르는 찬송은 성경에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신앙은 찬송을 말하지만 부르짖음을 잃어버렸습니다. 감사는 넘치지만, 왜 예수가 필요한지에 대한 절박함은 희미해졌습니다. 그러나 시편은 분명히 말합니다. 구원은 항상
‘처음 자리’를 확인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본래 흙이입니다. 아니, 죽은 흙이었습니다. 자궁 속에서조차 스스로 살아나온 존재가 아닙니다. 긍휼이 없으면 한순간도 존재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 처음 자리를 잊어버릴 때, 신앙은 열심으로 변질되고, 은혜는 거래로 전락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애굽에서 곧장 꺼내지 않으셨습니다. 왕조를 바꾸어 가며, 부르짖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부르짖음이 있어야 구원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저주가 아니라, 부르짖음을 끌어내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그리고 그 부르짖음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고백하게 됩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이 찬송은 상황이 좋아져서 나오는 노래가 아닙니다. 나 같은 존재를 살리신 은혜를 알게 되었을 때 나오는 노래입니다.

인생은 길지 않습니다. 눈 깜빡할 사이에 십 년이 지나갑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엇을 붙들 것인가, 이 땅의 만족인가, 아니면 영원을 여는 복음인가,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이 땅의 삶 너머를 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세상의 성공을 부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불쌍히 여깁니다. 복음을 모른 채 만족을 좇는 삶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시편 107편은 다시 찬송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이제 이 찬송은 다르게 들립니다. 길을 잃어본 자의 찬송, 쇠사슬에서 풀려난 자의 찬송, 부르짖음 끝에 건져 올려진 자의 찬송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이 찬송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물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진짜 부르짖음이 있는가, 그 부르짖음 속에서, 오늘도 하나님은 길이 되십니다. 그리고 그 길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