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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

구약의 복음 - 금강석 끝 철필로 새겨진 마음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 3.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예레미야 17:14)

예레미야 17장은 읽기 편한 말씀이 아닙니다. 위로보다는 폭로에 가깝고, 격려보다는 해부에 가깝습니다. 이 장에서 하나님은 유다의 죄를 말하시지만, 사실 그것은 특정 민족의 과거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의 나, 오늘의 교회, 구원받았다고 말하면서 여전히 나 중심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판과 그들의 제단 뿔에 새겨졌거늘.”(렘 17:1) 금강석은 다이아몬드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물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가 연필로 쓰인 것이 아니라, 지워지지 않도록 아예 심장에 새겨져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실수처럼 덧붙여진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에 각인된 상태라는 뜻입니다.

마음은 ‘
일부분’이 아니라 ‘전부’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마음’은 감정의 한 조각이 아닙니다. 히브리인들에게 마음은 인간의 전 존재, 곧 생각, 의지, 욕망, 판단, 선택 전체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마음이 부패했다”는 말은 내 안의 어떤 부분이 문제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문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이렇게 단언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문제는 인간이 이렇게 부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미 선악과를 먹고 ‘자기 자신이 기준이 된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 판단하고, 내 동기는 선하다고 확신하며, 내 행동은 충분히 정당하다고 스스로 판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 17:10)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자기 자신에게조차 속을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우리가 가장 아플 때는 언제입니까? 사람이 가장 아플 때는 실패했을 때가 아닙니다. 죄가 드러났을 때도 아닙니다. 내가 선하다고 믿어왔던 것들이 사실은 나의 영광과 안전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달을 때, 그때가 가장 아픕니다. 누군가를 위해 헌신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헌신 속에 ‘
인정받고 싶은 마음’, ‘의지처를 만들고 싶은 욕망’, ‘내 존재 가치를 확인받고 싶은 계산’이 섞여 있었음을 알아차릴 때, 사람은 본능적으로 방어합니다.

나는 아니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진심이었어.”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잖아.” 이 방어기제가 작동하면, 인간은 다시 안전해집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 방어막을 찢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리기 위해 찢으십니다. 달콤한 온도에서 삶아지는 개구리처럼 사람은 고통보다 안락함 속에서 더 쉽게 멸망합니다. 마귀는 우리를 단번에 지옥으로 끌고 가지 않습니다. 대신 서서히, 아주 따뜻하게, 안전하게 만듭니다.

돈이 조금씩 늘고, 관계가 안정되고, 자식이 잘되고, 가정이 평안해지면 우리는 하나님을 덜 찾습니다. 기도는 선택이 되고, 예배는 습관이 되고, 말씀은 참고자료가 됩니다. 마치 따뜻한 물 속에서 서서히 삶아지는 개구리처럼 말입니다. 문제는 그 상태가 축복처럼 느껴진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평안은 결국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 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기 때문에 물질을, 관계를, 자존심을, 인생의 안전장치를 끊으십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저주처럼 보이는 사건들인 사업의 실패, 관계의 붕괴, 사회적 추락, 건강의 상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을 다시 보게 만드는 통로가 될 때가 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서야 성경이 보이고, 모든 것을 잃고서야 예수가 이해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은 그것을 실패라고 부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구원의 자리가 되기도 합니다.

예레미야 17장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렘 17:14) 이 고백은 겸손한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완전히 무너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하나님, 제 마음은 제가 고칠 수 없습니다.” “제 안에는 답이 없습니다.” “저를 살리실 분은 오직 주님뿐입니다.” 이 고백이 터져 나올 때, 비로소 찬송이 시작됩니다.

진짜 사랑은 붙잡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을 알수록 우리는 세상에서 더 차가워 보일 수 있습니다. 덜 집착하고, 덜 매달리고, 덜 소유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정함이 아니라 객관적인 사랑입니다. 자식을 붙잡아 두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는 사랑, 관계를 소유하려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로 보내는 사랑, 하나님은 우리를 이 땅에 정착시키기 위해 부르신 분이 아닙니다. 찬송하게 하기 위해 부르셨습니다.

오늘도 말씀 앞에서 우리의 실체가 드러날 때, 도망치지 마십시오. 방어하지 마십시오. 대신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십니다. 나를 고치소서. 나를 구원하소서.” 그 기도가 나오는 자리, 그곳이 은혜의 시작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