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이사야 35:5~10)
이사야 35장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망의 장면 중 하나입니다. 맹인의 눈이 밝아지고, 못 듣던 귀가 열리며, 저는 자가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던 자의 혀가 노래하는 세계, 광야에서 물이 솟고 사막이 강으로 변하며,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고 기쁨과 즐거움만 남는 나라, 이 장면은 단순한 회복의 묘사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 곧 새 하늘과 새 땅을 묵시적으로 그려낸 복음의 그림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을 문자 그대로만 읽는 순간, 성경은 혼란스러워집니다. 어떤 곳에서는 사자가 어린아이와 함께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사자가 아예 없다고 말합니다. 이를 오류로 보거나 억지로 맞추려 할수록 성경은 멀어집니다. 문제는 성경이 아니라 성경을 읽는 관점에 있습니다.
성경에는 문자로 읽어야 할 때가 있고, 역사로 읽어야 할 때가 있으며, 묵시와 상징으로 읽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해석을 꿰는 단 하나의 실이 있는데 그것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중심에 두지 않으면, 성경은 조각난 지식이 되고, 신앙은 혼란이 됩니다.
이사야 35장 7절에서 “뜨거운 사막”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신기루’를 뜻합니다. 사막에서 목마른 사람이 바라보는 환영,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인생이 바로 그렇습니다. 사람은 평생 무언가를 좇습니다. 돈, 명예, 지식, 쾌락, 관계, 도덕, 심지어 신앙의 열심까지도, 저것만 있으면 해갈될 것 같고, 저기 도달하면 만족할 것 같아서 필사적으로 달려갑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해 보면 또 비어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다른 신기루를 향해 걷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이 모든 것은 아무 힘이 없습니다. 죽음을 무력화할 수 있는 이 세상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여전히 신기루를 샘으로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것들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그것으로 행복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신기루임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신기루가 있습니다. 그것은 착한 삶, 도덕, 윤리, 종교적 열심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칭찬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심지어 자기 몸을 갈갈이 찢어서라도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만족을 챙깁니다. 성경은 이것을 죄라고 부릅니다. 자기 의, 자기 영광, 자기 만족이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이 그랬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좋은 것”을 남겨 제사드리려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겠다는 명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고 수정하려 했습니다. 그때 사무엘이 말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여기서 ‘낫다’는 말은 ‘더 좋다’가 아닙니다. 히브리어 ‘토브’, 그것만이 선이다라는 뜻입니다. 순종만이 선입니다. 제사는 선이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을 해보겠다는 모든 시도는, 실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또 다른 형태의 교만일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해드릴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와 헌신과 금식과 봉사로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인의 제사와 다르지 않습니다. 가인은 자기 제사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을 죽였고, 바리새인들은 자기 신앙을 지키기 위해 예수를 죽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성도는 성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은혜로 사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예수라는 선물을 놓치지 않고 붙드는 것뿐입니다. 이사야가 말한 그 샘은, 인간의 노력으로 파낸 우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터져 나온 생명의 물입니다. 그 물을 마시는 사람만이, 신기루가 샘으로 변하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 나라에 “거룩한 길”이 있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 길로 간다고 말합니다. 이 길은 똑똑한 자의 길도 아니고, 열심 있는 자의 길도 아닙니다. 우매한 행인은 다닐 수 없다고 했는데, 여기서 우매함은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자기 의에 사로잡힌 완고함을 말합니다. 이 길은 내가 잘나서 걷는 길이 아니라, 예수께서 대신 열어주신 길입니다. 그래서 그 길에는 사자가 없습니다. 정죄도, 위협도, 두려움도 없습니다. 오직 노래만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조건이 아니라 선택입니다. 아가서의 술람미 여인은 아름답지도, 깨끗하지도, 자격이 있지도 않았습니다. 포도원의 노예였고, 햇볕에 그을린 초라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녀를 사랑했습니다. 이유는 없습니다.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랑받을 조건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랑하셨습니다. 사랑은 받는 자의 자격이 아니라, 주는 자의 선택입니다. 이 사랑이 진짜로 깨달아질 때, 사람 안에서 터져 나오는 것은 억지 열심이 아니라 찬송과 춤입니다. 기쁨이 몸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도는 억지로 거룩해지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이 안에 계시면, 겨울에 두꺼운 옷을 입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하나님 백성다운 반응이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반응을 흉내 내어 억지 열매를 만들어내고, 그것으로 자신을 증명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마귀의 속임입니다. 가짜 열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열심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자유롭게 기뻐하는 자를 원하십니다.
신앙은 나를 개선하는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신앙은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배우고, 그 위에 덮인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깨닫는 여정인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남는 고백은 이것 하나입니다. “예수가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고백 위에서만, 사막은 샘이 되고, 신기루는 실체가 되며, 슬픔과 탄식은 사라집니다. 그리고 구속함을 받은 자들은 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옵니다. 머리 위에는 영원한 희락이 있고, 발걸음은 가볍습니다. 이것이 이사야가 본 복음이며, 오늘 우리가 붙들어야 할 복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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