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행전 14장 8~10절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루스드라 성문 근처,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습니다. 이름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를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된 자"라고만 적습니다. 그는 태어난 날부터 한 번도 제 발로 땅을 딛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가고 싶은 곳이 있어도 갈 수 없었고,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할 수 없었습니다. 누구를 도울 수도 없었고, 무엇을 드릴 수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곁을 하루에도 수십 번 지나갔지만, 그가 거기 있다는 사실을 오래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날 길가에 낯선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앉은뱅이는 그 말을 들었습니다. 바울은 말하다가 문득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전합니다. 바울이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그 사람은 뛰어 걸었습니다.
이 장면을 읽으면 마음이 금방 한쪽으로 쏠립니다. "나도 저런 일을 겪어야 믿음이 진짜 아닐까?" 하는 쪽입니다. 병이 낫고, 눈에 보이는 체험이 있고, 간증할 거리가 생기면 신앙이 확실해진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시장에 가면 이런 마음이 어떻게 생기는지 알 수 있습니다. 과일 가게 앞에서 사람들은 반짝이고 크고 탐스러운 것을 고릅니다. 믿음도 그렇게 고르고 싶어집니다. 눈에 띄는 믿음, 응답받는 믿음, 하는 일마다 잘 풀리는 믿음이 따로 진열되어 있고, 그중 좋은 것을 골라 가질 수 있다고 여깁니다.
본문은 그런 진열대를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에는 등급이 없습니다. 믿음이냐 아니냐가 있을 뿐입니다. 복 받을 믿음, 기도 응답받을 믿음, 형통할 믿음이 따로 있다는 생각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한 만큼 대접받아야 한다는 종교적인 계산에서 나온 것입니다.
학교에 비유하면 이렇습니다. 성적에 따라 상을 달리 주는 곳에서는 모두가 점수를 신경 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성적표를 나눠 주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간증이 어느새 믿음의 성적표처럼 쓰이는 일이 있습니다. "이만큼 기도했더니 이런 응답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쌓이면 듣는 사람은 '나는 모자란가 보다' 하고 위축됩니다. 믿음에 점수를 매기는 일이 그렇게 시작됩니다.
다시 앉은뱅이를 보십시오. 이 사람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40일 금식을 했습니까? 성경을 외웠습니까? 봉사하고 헌신했습니까? 그는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믿음은 공로를 보고 주어지는 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주신 선물입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다리가 낫지 않았더라도 이미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구원은 그의 속에 이미 있는 믿음에서 시작되었고, 걷게 된 것은 그 위에 덧붙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눈은 낫는 기적보다, 그 곁에 계셨던 하나님께 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도를 세워 이런 기적을 보이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은 사람들에게 무시받던 앉은뱅이 같은 사람에게도 주어진다는 것을 보이시려는 것입니다. 열심히 한 사람에게 기적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의 생각을 뒤집으시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적을 본 군중은 엉뚱한 곳을 봅니다.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보고 "신들이 사람의 모양으로 내려왔다"며 제사를 드리려 합니다. 사도의 배후에서 일하신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사람만 보인 것입니다. 본문은 이것을 불신앙이라고 말합니다. 불신앙은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큰소리치면서도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사람과 현상만 보고 있다면 그것도 불신앙입니다. 유명한 목사님이나 놀라운 체험을 믿음의 증거로 삼는 것이 그런 모습입니다.
이런 상상을 해 보십시오. 한 번도 걸어 본 적 없는 내가 어느 날 벌떡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 그때 나는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주일성수하고 십일조를 열심히 했더니 하나님이 이렇게 해 주셨습니다"라고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에게는 내세울 행함이 없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저 같은 사람에게도 이런 은혜를 베푸십니까?" 이것이 구원받을 만한 믿음에서 나오는 반응입니다. 믿음은 나의 공로를 바라보게 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루를 다르게 삽니다. 눈에 보이는 자극이 없어도 지루해하지 않습니다. 대단한 일이 없는 평범한 날에도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 밥을 먹는 것, 숨을 쉬는 것까지 하나님이 살려 주시지 않으면 단 한순간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성도에게는 매일 사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믿음은 방향입니다. 마음과 생각과 뜻과 열심이 온통 하나님 쪽으로 향해 있는 것입니다. 내비게이션에 목적지가 입력되어 있으면 길이 평탄하든 구불구불하든 같은 곳을 향해 가는 것과 같습니다.
9절을 다시 보면 앉은뱅이는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전한 것은 복음뿐입니다. 복음을 듣다가 믿음이 생긴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었기에 복음에 귀를 기울인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참된 복음 앞에서 반드시 반응합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 안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십자가만 전하는 복음 앞에서는 시큰둥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 이야기가 없다. 우리의 삶과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이야기도 해야지" 하며 아쉬워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사람을 세워 일하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사도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도 뒤에서 일하신 하나님, 앉은뱅이 같은 사람에게 믿음을 주신 하나님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려 합니다.
마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이 목록 끝에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가 있습니다. 눈 뜨는 일, 걷는 일,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일과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이 나에게 전해졌다는 것은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만큼 큰 일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권세가 아니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복음을 듣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길가의 앉은뱅이와 같은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병이 낫는 체험이나 눈에 보이는 증거가 따로 더 필요하겠습니까? 성도는 나를 일으키시고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권세를 바라보며 감사할 뿐입니다. 그것이 구원받을 만한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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