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애굽기 14장 26~31절
2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물이 애굽 사람들과 그들의 병거들과 마병들 위에 다시 흐르게 하라 하시니
27 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밀매 새벽이 되어 바다의 힘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슬러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28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따라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으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29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행하였고 물이 좌우에 벽이 되었더라
30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에서 애굽 사람들이 죽어 있는 것을 보았더라
31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믿음이 우리에게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면 대부분 곧바로 "구원이요" 하고 대답합니다. 틀린 답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구원을 "죽어서 천국 가는 것"으로만 좁혀 놓으면 이상한 일이 생깁니다. 믿음이 내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도구로 전락해 버립니다. 이런 그림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절벽 위에 매달린 사람이 밧줄 하나를 붙들고 있습니다. 손을 놓으면 떨어집니다. 그러니 죽을힘을 다해 붙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이라면, 성도의 삶은 천국 문 앞에 도착할 때까지 손아귀 힘을 유지하는 일이 됩니다. 이미 구원받았다면서 믿음을 놓치면 구원이 취소된다고 하니, 마음이 늘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믿음을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1장 5~6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예정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기쁘신 뜻은 우리가 아들이 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아들이 된 우리가 거저 주신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이어 말합니다. 믿음은 그 길을 걸어가라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예수 믿고 천국 가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천국에 앉은 자로 오늘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은 홍해 사건입니다. 물이 갈라지고, 백성이 마른 땅을 걸었고, 쫓아오던 애굽 군대가 물에 잠겼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증거를 그들은 눈으로 보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다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말은 하지만 눈에 보이는 증거는 없습니다. 기도해도 어려움은 계속됩니다. 병든 사람은 세상을 떠납니다. 홍해는커녕 접시물 하나 갈라지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슬며시 고개를 듭니다. "저런 걸 봤다면 나도 얼마든지 믿었을 텐데. 이스라엘이 참 부럽다. 우리에게는 불공평하다." 정말 그럴까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이야기를 하나 들려 드리겠습니다.
월급 백만 원으로 겨우 살아가는 청년이 있습니다. 어느 날 기적처럼 월급이 천만 원이 됩니다. 첫 월급날 그는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고 저를 인도하십니다." 몇 달 뒤 승진하고 연봉이 또 오릅니다. 그는 여전히 감사합니다. 그러다 동기 하나가 자기보다 훨씬 큰 집으로 이사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다음 해에 그 동기는 임원이 됩니다. 그는 어느새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나에게만 이 정도로 하실까?"
기적이 없어서 불평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을 받고서도 불평합니다. 하루아침에 말단 사원에서 과장이 되고, 다음 날 부장이 되고, 그다음 날 이사가 되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사람이 그 정도 수준의 존재라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실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적을 계속 보여 주시기만 하면 될 테니 말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보아도 평생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그랬습니다. 출애굽기 15장에서 그들은 홍해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며칠 뒤, 마실 물이 쓰다는 이유로 모세를 원망합니다. 찬양하던 입이 원망하는 입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이 며칠이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수준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넜다고 해서 우리보다 유리한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체험을 했든 하지 않았든 사람은 똑같은 수준에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놀라운 체험이 아닙니다. 병이 낫고 기도가 응답되는 체험으로 믿음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라보는 방향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증거일 뿐입니다. 물론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주는 체험이라면 믿음은 분명 그런 체험도 줄 것입니다. 그러나 뽕나무를 뿌리째 뽑아 바다에 심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그 능력이 나의 죄를 알게 하고 주님만 의지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능력을 체험하고도 그리스도를 모른다면 멸망으로 끝납니다. 참된 기적은 내가 나의 죄를 알고 그리스도를 소망하고 의지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홍해 사건은 이스라엘의 구원보다 그들의 악함이 더 선명하게 드러난 사건입니다. 세상 누구도 겪어 보지 못한 기적을 체험하고, 그 구원을 찬양까지 했으면서 물이 쓰다는 이유로 자신들을 이끄는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홍해의 구원이 크게 보일수록 그들의 실패도 그만큼 크게 보입니다. 마치 새하얀 도화지 위에 떨어진 먹물 한 방울이 유난히 크게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애굽을 함께 홍해에 넣으시고 이스라엘만 나오게 하셨습니다. 생명과 죽음을 나누신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이후로 그 체험을 바탕으로 평생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았다면 "역시 구원받을 자격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며칠 만에 하나님을 원망한 그들은 애굽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죽음에 처해져야 마땅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살아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어린양의 피의 은혜로 죽음에서 건짐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백성을 앞으로도 멸망에서 지키는 것은 그들의 믿음의 강도가 아니라 어린양의 피의 은혜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 참된 이스라엘이고, 이것을 아는 것이 참된 하늘의 지혜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바로 이 지혜가 있는 사람으로 살게 합니다.
30~31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셨고, 이스라엘은 바닷가에 널린 애굽 사람의 시체를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애굽에 행하신 큰 일을 보고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본 큰 일의 증거는 애굽 사람의 시체였습니다. 그 시체는 어린양의 피의 은혜에 속하지 않은 세계가 받는 심판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심판을 바라보며, 자신들이 그 심판에서 건져졌다는 은혜 때문에 여호와를 경외하게 된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을 보면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애굽 군대를 치시는 장면은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장면은 29절 한 절에 짧게 나옵니다. 구원은 심판을 배경으로 했을 때 가장 선명하게 증거되기 때문입니다. 성적표로 비유해 보겠습니다. 시험이 있었는데 다 함께 낙제 점수를 받을 처지였다고 합시다. 그런데 나만 아무 대가 없이 통과 도장을 받았습니다. 옆에서 다른 사람들이 탈락하는 것을 본 사람은 그 도장을 결코 당연하게 여기지 못합니다. 반대로 모두가 통과하는 자리에서 받은 도장은 별 감흥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 군대가 없는 홍해를 건넜다면 홍해 사건은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의 장애물 하나가 치워진 일에 그쳤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 애굽 군대가 있었고 그들이 몰살당했기에, 홍해는 죽음에서 건짐 받은 생명의 사건이 되었습니다. 성도가 천국만 바라보아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배경으로 영생을 바라보지 않으면, 영생을 "예수 믿은 내게 돌아오는 당연한 결과"쯤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우리의 하루하루도 그렇습니다. 막연히 천국을 그리며 버티는 나날이 아닙니다. 하루하루가 생명의 사건으로 주어집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보고, 그 심판에서 나를 건지신 어린양의 피의 은혜를 보게 됩니다. 은혜를 보면 매일 은혜로 살면서도 감사하지 않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나의 악함이 보입니다. 그 모든 악함을 덮고 씻어 주신 은혜는 그만큼 더 크고 넓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어린양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볼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믿음이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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