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민은 요즘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대학부 리더로 3년을 섬겼는데, 이번 학기부터 다른 사역으로 옮겨달라는 요청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사역이 자신에게 더 맞고, 사실 마음도 끌립니다. 그런데 담당 목사님께 이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라 며칠째 속이 타들어갑니다. "내가 3년이나 키워주신 은혜를 배신하는 거 아닐까? 목사님은 분명 나를 은혜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실 거야. 그런데 사실… 내가 이기적인 게 맞는 것 같아." 정민을 괴롭히는 건 목사님이 아닙니다. 목사님은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민을 괴롭히는 건 정민 자신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정민이 스스로에 대해 갖고 있는 세 가지 다른 그림입니다.
심리학자 토리 히긴스는 사람 안에 세 종류의 자기개념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실제 자기), 되고 싶은 나(이상적 자기), 그리고 마땅히 되어야 한다고 믿는 나(당위적 자기). 이 셋이 어긋날 때 우리 마음에는 균열이 생깁니다. 정민의 경우, "의리 있는 후배"라는 당위적 자기와 "인정받고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이상적 자기가, 자신의 진짜 마음인 새로운 사역으로 옮기고 싶다는 실제 자기와 부딪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이론은 사람의 마음을 정확하게 짚어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그 "이상적 자기"와 "당위적 자기"는 대체 누가 그려준 그림입니까?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지은 첫 죄는 선악과를 먹은 행위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그 이전에, 하나님이 정해주신 자리를 벗어나 스스로 자기 자신을 규정하려 한 것이 죄의 뿌리였습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창 3:5)라는 뱀의 말은, 다른 누군가가(결국은 자기 자신) 스스로에게 "너는 이래야 한다"는 기준을 세우도록 유혹한 것이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인간은 늘 자기 자신에게 이상적 자기와 당위적 자기의 상을 그려 넣습니다. 문제는 그 화가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부모의 기대, 사회의 성공 기준, 교회 공동체의 시선, 이런 것들이 붓을 쥐고 우리 안에 "너는 이런 사람이어야 해"라는 그림을 그려 넣습니다. 정민이 "의리 있는 후배"라는 상에 짓눌린 것도, 실은 성경이 아니라 관계 속의 암묵적인 기대가 그려 넣은 그림 때문이었습니다. 이 그림이 하나님이 그려주신 것이 아닐 때, 우리는 평생 그 그림에 자신을 맞추려다 지쳐 쓰러집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그토록 격렬하게 싸운 것도 바로 이 문제였습니다. 율법을 지켜야 진짜 그리스도인이라는 "당위적 자기"의 상을 세우려는 유대주의자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성경에서 자기 불일치로 가장 처절하게 무너진 사람을 꼽으라면 베드로일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마 26:33)라며 자신의 이상적 자기를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러나 몇 시간 뒤, 그는 여종 앞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닭이 울던 그 새벽, 베드로의 실제 자기와 이상적 자기 사이의 간극은 그를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 그는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습니다(마 26:75).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오셨을 때, 그분은 베드로의 실패를 흑백논리로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5)라고 세 번 물으심으로, 세 번 부인한 자리를 세 번의 사랑 고백으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이제 실패자다"라는 새로운 딱지를 붙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내 양을 먹이라"며 그를 다시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이것이 하버드 로스쿨 교수 더글러스 스톤이 말한 흑백논리와 정확히 반대되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스톤은 사람이 자신에 대해 단 하나의 부정적인 이야기를 들어도 정체성 전체가 무너지는 심리적 터널 시야에 빠진다고 지적했습니다. "나는 완전히 실패자야"라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이 터널 시야를 깨뜨립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오늘 내가 얼마나 잘했는지에 따라 매번 재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단번에 선언된 칭의의 판결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개그우먼 박나래는 한 강연에서,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개그우먼 박나래, 여자 박나래, 디제잉하는 박나래가 있으니까"라고 말입니다. 누군가 한 가지 모습을 비난해도, 자신이 가진 다른 모습들이 그를 지탱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여러 얼굴이 있습니다. 학생이기도 하고, 직장인이기도 하고, 자녀이기도 하고, 친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얼굴 아래에는 흔들리지 않는 하나의 근본적인 정체성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 5:17). 이 정체성은 오늘의 실적이나 타인의 평가에 따라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 위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고전 6:19~20)라고 선언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글의 원저자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과의 대화"라고 결론짓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자신과의 대화보다 앞서야 할 대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를 지으시고 나를 아시는 하나님과의 대화, 곧 말씀과 기도입니다. 다윗은 시편 139편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시 139:1). 그는 자기 자신을 성찰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지으신 이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물었습니다.
정민이 그 밤, 잠 못 이루며 매달려야 했던 것은 "내가 이기적인가 아닌가"를 스스로 재판하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제가 정말 누구인지 말씀해 주세요"라고 묻는 자리였습니다. 그 대화 속에서, 정민은 자신의 진로 결정이 배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다음 걸음일 수 있음을, 그리고 설령 상사가 실망하더라도 자신의 정체성은 그 실망 위에 세워져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확정되었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비로소 누군가 함부로 던지는 말에 함부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흔들리는 것은 스스로 세운 기준 위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너는 내 사랑하는 자녀"라는 하나님의 선언 위에 서 있는 사람은, 세상의 어떤 평가 앞에서도 그 뿌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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