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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으로 사는 삶

십자가 하나로 충분한 사람, 믿음과 십자가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0. 19.

고린도전서 2장 1~5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어느 마을 시장 골목에 오래된 약국이 하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약국 주인을 두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
저 양반은 약 이름만 대면 효능을 줄줄 외운대." 그런데 정작 그 약국에서 병이 나은 사람들은 약사의 해박한 지식 덕분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약이 좋았기 때문에 나았다고 했습니다. 약사가 아무리 말솜씨가 좋아도 약 자체에 힘이 없다면 병은 낫지 않습니다. 약사의 설명은 약을 가리킬 뿐이고, 병을 고치는 것은 약입니다.

이천 년 전 고린도 교회에도 이 단순한 이치를 잊어버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먼저 자신이 처음 고린도에 갔을 때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는 유창한 말솜씨나 뛰어난 지혜를 앞세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약하고 두려워 떨면서 그들 앞에 섰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이 교회는 넷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바울이 좋다는 사람, 아볼로가 좋다는 사람, 베드로가 좋다는 사람, 그리고 "
우리는 그리스도파"라며 은근히 자기들이 더 낫다는 듯 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마다 자기 취향과 입장에 맞는 사람을 골라 따랐던 것입니다. 요즘 학교 운동장이나 직장 점심시간에도 비슷한 일이 있습니다. "나는 이 선생님 수업이 제일 좋아", "나는 그 목사님 설교만 들어야 은혜가 돼." 그렇게 마음에 드는 사람 뒤에 줄을 서다 보면, 정작 그 사람이 가리키던 곳은 보이지 않게 됩니다. 손가락 끝만 쳐다보고 있으니 손가락이 가리킨 달은 놓치는 셈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을 책망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복음이 전해지고 사람이 믿게 되는 일은 전하는 사람의 말재주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일입니다. 그러니 누구의 말솜씨가 더 뛰어난지를 놓고 칭송할 이유가 없습니다. 구원은 사람의 뜻과 상관없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내 힘으로 구원받았습니다"라고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런 말을 꺼내는 순간 이단 소리를 들을 것을 모두가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마음속은 다를 때가 많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불안합니다. 기도도 하고 봉사도 하고 헌금도 해야 비로소 구원받은 사람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사람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사람의 생각과 이성에 맞게 고쳐서 이해하려는 것입니다. "구원도 받을 만한 사람이 받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그 밑에 깔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두 아들 이야기가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챙겨 나가서 다 탕진하고 거지꼴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달려 나가 아들을 끌어안고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집에 남아 성실하게 일하던 맏아들은 이 소식을 듣고 화가 났습니다. "
저는 아버지를 여러 해 섬기며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는데, 저런 아들에게 잔치를 열어 주십니까?" 우리는 맏아들의 이 반응을 쉽게 비웃지 못합니다. 평소에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이 마음이 슬그머니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신다는 말은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나는 구원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일도 수없이 빠지고 기도도 안 하고 자기보다 형편없어 보이는 사람까지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고 하면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
어떻게 저런 사람까지?"
그 불편함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않고 나 자신을 보고 있기 때문에 생깁니다. 자기 기준으로 하나님께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는 이런 계산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기도를 몇 시간 했는지, 십일조를 빠뜨리지 않았는지, 성경을 몇 번 읽었는지, 교회 봉사는 얼마나 했는지 십자가는 일언반구도 묻지 않습니다. 설령 그 사람이 악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기어이 구원하고야 말겠다는 하나님의 열심과 사랑이 거기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의 은혜는 하나님이 사랑하기로 작정하시고 택하시고 부르신 백성에게 주어집니다. 이것은 사람의 지혜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어리석게 보이는 것입니다. 바울은 2절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런데 이 선언을 듣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십자가는 이미 다 배워서 잘 안다. 이제는 십자가 밖으로 나가 선한 일을 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성도가 할 일이다." 죄 용서를 받았으니 더 이상 죄인의 자리에 머물 이유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십자가는 졸업했고, 이제는 성도답게 사는 단계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생각은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이렇게 물어봐야 합니다. 죄 용서를 받았다고 해서 죄와 상관없는 사람이 된 것일까요? 용서받았어도 사람은 여전히 죄의 영향 아래 있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죄짓고 용서받고 또 죄짓고 또 용서받는 일을 계속 반복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내가 죄의 힘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내 죄에서 확인하고, 그런 나를 구원하는 것이 십자가의 능력임을 날마다 깨닫는 일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의를 의지하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살아도 죽어도 예수님의 은혜가 전부인 길을 걷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바다에서 배를 모는 항해사에게 등대는 어떤 존재일까요? 항해를 오래 했으니 이제 등대는 필요 없다고 하는 항해사는 없습니다. 오히려 경험 많은 항해사일수록 바다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기에 등대의 불빛을 더 열심히 찾습니다. 자기 실력만 믿고 불빛을 외면한 항해사는 어느 순간 암초에 부딪힙니다.

죄를 아는 것은 이 불빛과 같습니다. 내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죄의 자리를 알아야 십자가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그 자리를 외면한 채 성도로서 해야 할 일에만 몰두하면 십자가의 은혜는 어느새 과거의 일로 흘러가 버립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죄를 말하며 십자가의 은혜를 외치는 설교가 한쪽으로 치우친 복음처럼 들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외에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한 바울은 한쪽으로 치우친 사람일까요? 이런 말이 나오는 이유는 자기 이성과 생각으로 성경에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연구한다면서 자기 이성에 맞는 말로 끼워 맞추다 보니, 오직 십자가만 외치는 복음이 반쪽짜리 복음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은 무엇을 하는 것일까요? 5절 말씀대로, 믿음은 성도가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만 믿게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만 자기 전부로 바라보게 합니다. 믿음은 신자에게 십자가만 알게 할 뿐입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을 보게 하고, 주님이 흘리신 피의 은혜로 기뻐하고 감사하게 합니다.

이런 성도는 주님으로 인해 모든 것이 채워진 복된 길을 갑니다. 이 사람이 찬송하고 감사하고 자랑할 것은 주님의 은혜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한쪽으로 치우친 믿음이라고 부른다면, 기꺼이 예수님의 십자가에만 치우친 믿음으로 살겠다는 것이 이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많은 사람이 믿음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안에서 믿음이 자라고, 그 믿음이 힘을 발휘하면 지금까지 보지 못한 놀라운 능력의 삶을 살게 되리라는 환상입니다. 어릴 때 읽은 만화책의 주인공이 어느 날 숨은 힘을 깨우쳐 갑자기 강해지는 장면처럼 말입니다.
물론 믿음이 일하면 성도는 능력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능력의 삶은 바울의 고백과 같습니다. 오직 십자가만 알기를 원하는 삶입니다. 다른 것에 마음이 가지 않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일에만 마음이 향하는 것, 이것이 믿음의 능력이고 믿음이 하는 일입니다. 믿음 덕분에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수준의 행동을 보이게 되리라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처음의 약국 이야기에서 병을 고치는 것은 약사의 말솜씨가 아니라 약이었습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살리는 것은 내 믿음의 크기나 내 행동의 수준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십자가만 알기 원하는 성도로 새롭게 만들어 갑니다.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이 내 인생의 전부라는 고백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믿음에 온전히 붙들린 성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