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베소서 2장 1~3절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오래전 어느 주일, 한복에 도포를 곱게 차려입은 어르신 한 분이 처음으로 예배당 문을 넘어왔습니다. 동양학을 공부하던 아들이 권해서 온 걸음이었습니다. 뒷자리에서 말없이 설교를 듣던 어르신의 표정이 굳은 것은 목사님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입니다" 하고 말했을 때였습니다. 어르신은 벌떡 일어나 "거 개똥같은 소리 그만 좀 하쇼" 하고는 예배당을 나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한 청년도 속으로 무릎을 쳤습니다. '그 어른 말씀 한번 잘하셨다.' 방금 태어난 아기가 무슨 죄를 지었다는 말인가? 그러나 세월이 흘러 그 청년이 목사가 되고, 사람을,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알면 알수록 생각은 거꾸로 뒤집혔습니다. 그 '개똥같은 소리'가 진리 중의 진리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같은 말을 합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3절입니다. 바울은 먼저 에베소 교인들에게 "너희가" 허물과 죄로 죽어 세상 풍속을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고 말합니다. 그러다 3절에서 슬쩍 말을 바꿉니다. "우리도 다." 이방인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유대인인 자신도 똑같았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 배워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나면서부터 그렇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기서 반문합니다. 그래도 사람은 선을 택할 수도, 악을 택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그것이 자유 의지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담이 가졌던 그런 자유가 타락과 함께 사라졌다고 말합니다. 아담 이후의 사람은 죄를 지을 수도, 안 지을 수도 있는 중간 지대에서 태어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쪽으로 기울어진 채 태어납니다. 악은 마음먹으면 할 수 있어도 선은 마음먹는다고 되지 않습니다. 눈이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증거로 바울은 죽음을 예로 듭니다. 모세의 율법이 주어지기 전, 아담에서 모세까지 수천 년 동안에도 사람들은 죽었습니다. 죄의 삯이 사망이라면 죽었다는 것은 죄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신호등이 없던 시절에는 빨간불에 아무리 달려도 딱지를 끊을 사람이 없었겠지만, 그때에도 사람은 죽었습니다. 자기 의지로 죄를 지어 볼 기회조차 없었던 갓난아기들도 죽었습니다. 아담이 온 인류의 머리였기에 우리는 그 안에서 모두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새 머리가 되셔서, 그분 안에 있는 사람은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요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는 원래 선한데 나쁜 환경과 나쁜 본보기 때문에 나빠지는 것이니, 환경만 좋게 만들어 주면 된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한 환경은 어디였을까요? 에덴동산입니다. 나쁜 친구도, 나쁜 뉴스도, 부족한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인간은 타락했습니다. 문제는 환경이 아니라 사람 자체였습니다.
심리학의 거장 프로이트는 사람 안의 가능성을 믿었지만, 정작 자신은 우울과 약물에 시달리며 쓸쓸히 생을 마쳤습니다. 반대로 그의 영향을 받아 불가지론자로 살던 C. S. 루이스는 하나님을 만난 뒤 자유와 기쁨을 누렸습니다. 하버드의 한 교수가 쓴 『루이스 대 프로이드』는 두 사람의 삶을 나란히 보여 줍니다. 죄의 뿌리는 결국 한 가지입니다. 순종해야 할 대상이 있다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 자기 인생의 왕좌에 자기가 앉겠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그랬고 우리도 그랬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자유라고 부릅니다.
한국에서 미국까지 배를 타고 몇 달씩 간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처음 며칠은 좋습니다. 바다도 보고 바람도 쐽니다. 그러나 두 주가 지나면 답답해집니다. 어디로 걸어가도 난간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낀 승객 몇이 외칩니다. "진짜 자유는 저 바다 속에 있지!" 그러고는 뛰어내립니다. 어떻게 될까요? 바다에는 상어가 있습니다. 배 위의 자유는 제한되어 있어도, 선장의 지시를 따라 배를 의지하는 사람만 목적지에 닿습니다. 그런데 죄인은 난간에서 팔다리가 뜯겨 죽어 가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와, 자유롭겠다, 재밌겠다" 하고 부러워합니다. 그 정도로 눈이 멀어 있습니다.
옛날 샌프란시스코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해리 아이언사이드라는 목사님이 시장 어귀에서 구세군 사람들의 청으로 즉석 설교를 했습니다. 가만히 듣던 한 신사가 명함 뒤에 무언가를 적어 건넸습니다. 기독교를 공격하며 다니던 유명한 무신론자였습니다. 명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다음 주일 오후 네 시, 공개 토론을 합시다. 비용은 제가 대겠습니다." 목사님은 그 명함을 군중 앞에서 큰 소리로 읽고 말했습니다. "좋습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불가지론 덕분에 시궁창 같은 삶에서 건짐을 받아 지금 행복하게 사는 사람을 한 명만 데려오십시오. 그러면 저는 복음으로 새 사람이 되어 기쁘게 사는 사람 백 명을 데려오겠습니다." 그러자 한 소녀가 외쳤습니다. "선생님, 저도 갈게요!" 구세군 사람이 외쳤습니다. "저희가 사십 명 보내겠습니다!" 여기저기서 손이 올라갔습니다. 신사는 손사래를 치며 슬그머니 자리를 떠났습니다.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는 매일 저녁 맥주잔에 소주를 반병씩 부어 단숨에 마시고서야 밥을 먹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그것이 자유라고 생각했습니다. 하고 싶은 대로 마시고 사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 그럴 수도 없는 사람이 되었고, 그것을 못 한다고 불만도 없습니다. 꼭 그래야만 했던 때가 오히려 죄의 종이던 때였습니다. 그는 가끔 혼자 씨익 웃습니다. 죽어도 천국에 가고, 새 몸을 입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것을 생각하면 너무 행복해서 말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을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낸다"고 씁니다. 여기서 '육체'는 고깃덩어리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몸과 마음을 포함해, 죄의 충동을 받는 사람 전체를 가리킵니다. 또 강한 소원이 모두 나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도 고난받기 전에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하셨는데, 그 '원하고 원하였다'가 바로 욕심과 같은 단어입니다. 배고플 때 밥을 먹고, 졸릴 때 쉬고, 즐겁게 웃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부모가 가장 기쁠 때는 언제일까요? 자식이 껌을 팔아 돈을 벌어 올 때가 아니라, 차려 준 밥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볼 때입니다. 하나님도 그러셨습니다. 사람을 만들어 복을 주시고 기뻐하셨습니다. 문제는 선물에 빠져 선물 주신 분을 잊는 것입니다. 절제를 잃은 욕구는 죄가 됩니다. 먹는 것이 사람을 끌고 가고, 쾌락이 사람을 끌고 갑니다.
마음에서 올라오는 욕구도 있습니다. 꿈과 비전과 야망입니다. 이것도 사람을 충동질하고 끌고 갑니다. 사람은 이름을 얻으려고 질투하고 시기하고 분노합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자서전을 펼쳐 보면 그들이 무엇을 위해 살다 갔는지 금방 드러납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본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데만 시간을 썼습니다. 새 소식을 먼저 알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 남보다 많이 안다는 우월감도 같은 욕심입니다. 알코올, 마약, 도박, 쇼핑, 일, 심지어 커피까지 겉모습은 달라도 뿌리는 하나입니다. 자기를 즐겁게 하려는 왕 노릇입니다. 법에 걸리지 않으니 나는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입니다.
그렇다면 모두가 행복을 좇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정말 행복할까요? 역설이지만, 행복을 목표로 삼는 순간 사람은 불행해집니다. 가정을 보십시오. 신혼부부가 "우리 집의 목표는 행복이야" 하고 시작합니다. 그러면 남편은 아내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아내는 남편이 조금만 더 노력하면 행복할 텐데 하며 서로를 채점하기 시작합니다. 목표에 못 미치는 만큼 서로가 불행의 원인이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가정의 목표는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과 책임입니다. 남편은 예수님의 역할을, 아내는 교회의 역할을 맡아 이 땅에서 천국을 미리 배웁니다.
아무리 못난 남편이라도 "저 사람 때문에 내가 불행해" 하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2천 년 전 이스라엘이 망한 것도, 신랑으로 오신 예수님이 얻어맞고 조롱당하는 것을 보며 "저런 무능한 사람이 무슨 메시아냐" 하고 돌아섰기 때문입니다. 속이 터져도 따르는 가운데 아내는 순종과 인내와 사랑을 배웁니다. 옛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 때 전해 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장군의 아내가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소식을 들은 장군이 달려가 "아내 대신 저를 죽여 주십시오" 하고 엎드렸습니다. 왕은 "너희의 사랑은 죽음도 끊을 수 없겠구나" 하며 둘 다 놓아주었습니다. 궁을 나서며 남편이 말했습니다. "왕의 자비로운 눈을 보았소?"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왕을 보지 않았어요. 저를 위해 죽겠다는 한 사람만 보고 있었어요."
조금 느끼한가요? 그래도 부럽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큰 남편이 있습니다. 자기 손에 못을 박는 원수를 위해 실제로 죽어 주신 예수님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보실까요? 바울은 "진노의 자녀"라고 씁니다. 에덴에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화염검으로 막으신 일, 홍수와 바벨탑과 소돔의 일은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분임을 보여 줍니다. 세례 요한은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외쳤고, 요한복음은 아들께 순종하지 않는 자 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다고 말합니다. 그 진노는 지옥에서 마침내 나타나지만, 지금도 불순종하는 이들 위에 머뭅니다. 그들은 행복을 좇아 달리지만 끝내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옛 모습이었습니다. 아들을 죽이시고 다시 살려 하늘 보좌에 앉히신 그 능력이 우리를 구덩이에서 끌어내셨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았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완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여전히 옛 육체와 새 영이 함께 있고, 그 둘이 싸웁니다. 하나님은 일부러 그 싸움을 남겨 두십니다. 우리가 어디서 건져졌는지 잊지 말라고, 이미 이겨 놓은 그리스도의 싸움에 우리를 불러 참여시키시려고 말입니다. 그러니 힘든 날이 오면 그 감격을 꺼내 보십시오. 작은 불평과 불만은 그 안에서 녹아내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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