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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으로 사는 삶

믿음의 능력 - 겨자씨만한 믿음, 그리고 무익한 종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9. 20.

누가복음 17장 5~10절

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7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어느 마을에 오래된 뽕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나무를 볼 때마다 신앙 좋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
믿음만 있으면 저 나무도 뿌리째 뽑혀 바다에 심길 수 있다던데." 그 말을 들은 한 청년이 나무 앞에 서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오늘은 정말 믿어보자. 의심하지 말고.' 그는 눈을 감고 온 힘을 다해 믿으려 애썼습니다. 그러나 나무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고, 청년은 고개를 숙인 채 돌아섰습니다. '내 믿음이 부족한가 보다.' 그는 그렇게 결론 내리고, 더 뜨거운 믿음을 갖기 위해 기도원을 찾아 나섰습니다.

이 청년의 이야기는 낯설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이와 비슷한 자리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병이 낫고, 문제가 해결되고, 기도가 응답되는 그런 '능력 있는 믿음'을 갈망하면서, 정작 그런 간증을 듣고 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자신의 신앙이 초라해 보입니다. '내 믿음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으로 더 열심히, 더 뜨겁게 믿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의 밑바닥에는 한 가지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믿음은 내 하기 나름이다.' 하나님이 씨앗 같은 믿음을 주셨으니, 이제 그것을 잘 키우고 뜨겁게 달구어서 좋은 믿음, 능력 있는 믿음으로 완성시키는 것은 내 몫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믿음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오해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불완전한 믿음을 주시고, 그것을 완전하게 만드는 일을 우리에게 맡기셨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결정적인 구멍이 있다는 뜻이 됩니다. 마치 목수가 다리를 절반만 만들어 놓고, 나머지 절반은 그 다리를 건너야 할 사람에게 알아서 완성하라고 떠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다리를 누가 안심하고 건널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위로부터 주어진 믿음은 처음부터 완벽합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데 있어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 믿음이 성도를 붙들고 다스려서 구원의 자리까지 이끌어 가는 것이지, 성도가 그 믿음을 키우고 훈련시켜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
뜨거운 믿음을 가지라", "믿음을 키우라"는 말은 얼핏 경건해 보이지만, 사실은 믿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데서 나오는 말입니다.

본문 누가복음 17장 6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마가복음 11장 23절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산더러 바다에 던지우라 말하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으면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생각해 봅시다. 비는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집니다. 이것은 우리 몸에 새겨진 상식이고, 평생 보고 겪어온 경험입니다. 그런데 떨어지는 빗줄기를 향해 "
위로 올라가라"고 말하면서 마음에 조금의 의심도 없을 수 있습니까? 산이 저절로 뽑혀 바다에 던져지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모든 상식과 경험이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말을 입 밖에 내는 순간 우리 마음속에서는 이미 '이건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
너희가 노력하면 그런 믿음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마음에 추호의 의심도 없는 믿음이란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다는 것, 그러므로 겨자씨만한 믿음조차 인간 스스로는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의 결론은 하나입니다. 스스로 믿음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배경을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용서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3~4절). 형제가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해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횟수의 문제가 아니라, 끝없는 용서를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이 5절에 나옵니다. "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제자들의 이 고백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지금 우리에게도 믿음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끝없는 용서를 실천할 만큼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믿음을 좀 더 채워주십시오'라는 뜻입니다. 요컨대 제자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용량이 부족한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조금만 더 채워지면 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6절)은 제자들의 기대와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킵니다. "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말씀은 사실상 '너희에게는 지금 겨자씨만한 믿음조차 없다'는 선언입니다. 제자들은 자기 믿음의 양을 걱정했지만, 예수님은 그 믿음의 뿌리, 곧 주체 자체를 다시 짚어주신 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다 된다'는 사고방식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어려운 일을 만나면 믿음으로 기도하면 풀릴 것이고, 병들면 믿음만 있으면 나을 것이라는 식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마음 깊이 믿는 사람이 실제로 얼마나 있을까요? 세상일이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문제가 생기면 기도하고, 병이 들면 낫기를 구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혹시나' 하는 심리적 기대감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믿음이 없어서일까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몰랐다면 "
믿으면 다 됩니다"라는 말이 얼마나 사람들을 선동하는 데 효과적인지 알기에, 저 역시 그런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 교회는 이런 '믿음만능론'을 사실상 믿음 그 자체로 가르치고 있고, 교회 문을 들어서면 습관처럼 "믿습니다"를 외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면 굳이 "
믿습니다"라고 외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보여주지 않아도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애써 믿음을 드러내려는 것은, 실은 '내 믿음을 보시고 내 소원을 들어주십시오'라는 속셈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믿음을 가장한 거래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믿음은 어디에 뿌리를 두어야 할까요? 본문의 결론인 10절이 그 답을 줍니다. "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믿음의 주체를 자기 자신에게 두는 사람은 이런 고백을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행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반드시 그 행함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게 됩니다. 마치 직원이 회사에 사표를 던지듯 "제가 이만큼 했으니 이만큼 받아야 합니다"라고 계산서를 내미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종은 다릅니다. 종은 주인의 명령대로 행할 뿐이고, 그 일에 대해 따로 사례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스스로 하나님의 종이라 자처하면서도 자신의 헌신과 봉사를 내세우며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은근히 기대한다면, 이는 이미 종의 자리를 벗어나 하나님과 거래하려는 장사꾼의 마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반면, 믿음의 주체를 하나님께 둔 사람은 다릅니다. 형제를 사랑하고, 복음을 전하고, 은혜를 나누고, 봉사하고 헌신하면서도 '내가 한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나는 주인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을 뿐이고, 그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조차 믿음의 능력일 뿐이다'라는 생각만 있을 뿐입니다.

뽕나무가 뿌리째 뽑혀 바다에 심긴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두고 엄청난 기적이라 할 것입니다. 산이 통째로 들려 바다에 던져진다면 온 세상이 놀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연 현상의 이변이 사람의 속마음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산을 옮기는 능력을 체험했다 해도, 그 사람이 여전히 자기중심적이고 완악하다면 그것은 진짜 기적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만 바라보던 완악한 인간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 계산하지 않고 순종하며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뽕나무를 바다에 심는 것보다, 산을 바다에 던지는 것보다 더 위대한 기적입니다. 그리고 이 기적은 우리의 노력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주어진 믿음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낸 일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뜨거운 믿음을 만들어내려는 몸부림이 아닙니다. 이미 완전하신 그 믿음의 주인을 신뢰하며, 무익한 종으로서 그저 순종하는 자리에 서는 것, 그 자리에서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을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