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브리서 11장 1~2절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어느 시골 교회 입구에는 오래된 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습니다. 가을이면 가지마다 주홍빛 감이 열렸는데, 아이들은 그 감을 따 먹으려고 담장 위로 기어오르곤 했습니다. 감이 어디에 열렸는지는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압니다.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눈만 뜨면 알 수 있고, 손만 뻗으면 닿는 것이 세상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일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우리의 이해와 상식으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머리로 이해할 수 있고 결심으로 붙들 수 있는 분이라면, 하나님이 굳이 믿음을 선물로 주실 이유가 없습니다. 담장에 올라 감을 따듯 우리 힘으로 얻을 수 있다면 선물은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도 오늘의 교회는 자기 이해와 생각으로 예수님께 다가가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장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믿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같이 인간의 이해에 맞춰져 있습니다.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한 수단으로 믿음을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믿음이 참 믿음이 아니라는 것은, 참 믿음이 무엇을 증거하는지 알게 될 때 저절로 드러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그것을 말해 줍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1-2). 먼저 '바라는 것'부터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
당신은 무엇을 바라며 사십니까? 사람이 바라는 것은 크게 두 방향으로 나뉩니다. 하나는 땅을 향하고, 다른 하나는 하늘을 향합니다. 이 둘을 동시에 똑같이 바랄 수는 없습니다. 한쪽을 간절히 바라면 다른 쪽에 대한 관심은 자연히 희미해지기 때문입니다.
한 청년의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이름이 민수라는 한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민수는 어릴 적 가난했습니다. 월세방 장판 밑으로 겨울바람이 올라오던 집에서 자랐습니다. 그에게 '바라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번듯한 아파트, 안정된 직장, 남부럽지 않은 자식이었습니다. 이 바람이 어디서 생겼을까요? 민수는 그 모든 것을 날마다 눈으로 보았습니다. 출퇴근길에 지나는 아파트 단지의 불빛, 동창 모임에서 만난 친구의 새 차, 성공한 자식 자랑에 여념이 없는 부모들의 얼굴이 그 증거였습니다. 부자라는 실상이 눈앞에 있으니 마음이 이끌리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세상의 것은 실상이 이미 세상에 있다는 점입니다. 믿음이 없어도 볼 수 있고 알 수 있습니다. 부자가 되고 싶다면 부자가 어떤 모습인지 세상에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식이 잘되기를 바란다면 잘된 자식을 둔 부모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이 부러움이 되고, 부러움이 욕망이 됩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을 바라는 데는 믿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것은 다릅니다. 호화 아파트는 실상으로 존재하지만 천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눈을 비비고 둘러봐도 천국의 실상은 이 땅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천국은 좋은 곳일 거야" 하고 막연하게 생각할 뿐, 부러움은 세상의 것보다 훨씬 약합니다. 보이지 않으니 마음이 끌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놀라운 말을 합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하늘의 것의 실상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믿음이 주어졌다는 것이 곧 성도가 바라는 하늘의 것의 실상을 가졌다는 뜻이라는 말입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믿음이라는 실상을 가진 사람은 하늘의 것을 알아보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시력이 나쁜 아이가 처음 안경을 쓰던 날을 떠올려 보십시오. 안경을 쓰기 전에도 나뭇잎은 거기 있었습니다. 다만 흐릿한 초록 덩어리로만 보였을 뿐입니다. 안경을 쓰자 한 장 한 장의 잎맥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아이는 "세상에, 나무가 이렇게 생겼었구나" 하고 놀랍니다. 하지만 이 비유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안경은 눈에 보이는 것을 더 선명하게 해 줄 뿐입니다. 믿음은 아예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사서 쓰는 안경이 아니라 하나님이 얹어 주시는 선물입니다.
물론 이 땅에서는 모든 것이 또렷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2절의 말씀대로 우리는 지금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게 봅니다.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온전히 알게 되는 날은 하늘나라에 거할 때입니다. 그러나 희미하게라도 보는 자와 아예 못 보는 자는 하늘과 땅만큼 다릅니다.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씀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이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것은 세상의 것으로 얼마든지 증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늘에 속한 것은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증거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으로 증거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하늘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병 고침도, 귀신을 쫓아내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눈에 보이는 것들로 보지 못하는 것을 확보하려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믿음이 없다는 사실을 드러낼 뿐입니다.
이 대목에서 오늘의 교회를 돌아보게 됩니다. 사업이 잘되면 "하나님이 복 주셨다" 하고, 자식이 좋은 대학에 가면 "믿음의 열매"라고 하며, 안수 받고 병이 나으면 "성령의 역사"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증거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이 말하는 것은 결국 세상의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역사가 정말 병 낫고 방언하는 것으로 증명된다면, 성경에 기록된 일들이 그대로 반복되어야 합니다. 여기저기서 소경이 눈을 뜨고, 문둥병자가 깨끗해지고,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서야 합니다. 독사에게 물려도 죽지 않고 독을 마셔도 멀쩡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가 말하는 하나님의 역사에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일하심의 증거도 믿음입니다. 믿음이 주어져야만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세상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성도가 바라며 사는 하늘의 것에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도도 세상에서 여러 일을 겪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일이 세상에서 겪는 일이 전부는 아닙니다.
집사님 한 분이 퇴근길에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석 달을 병원에 누워 있었습니다. 만약 그 사고가 하나님의 일의 전부라면, 갈비뼈가 부러졌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병실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있던 어느 밤에 이런 생각이 찾아왔습니다. '나는 내 노력으로 여기까지 살아온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 무사했던 것도 내가 잘해서가 아니었구나.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붙들고 계셨구나.' 그리고 자기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는 낮아짐으로 나아갔다면, 그때 비로소 그 사고가 진짜 하나님의 일이 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 마음을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얹어 놓으려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그리고 그 흐름은 믿음이 아니고서는 볼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다면 같은 병실에서 나오는 말은 "빨리 낫게 해 주세요" 하는 애원뿐일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증거가 하나도 없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형편이 어떻게 흘러가도, 보지 못하는 것을 자기 전부로 바라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참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참 믿음이 나타나면 눈에 보이는 것을 증거로 내세우던 모든 믿음이 가짜였음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세련된 가짜 증거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윤리와 도덕입니다. 방언이나 병 고침은 열심 있는 사람들의 일이라고 쳐도, 착하게 사는 것이야말로 믿음의 증거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믿는 사람이 저러면 되겠어?" 하는 말 속에는 이런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윤리와 도덕은 믿음과 상관없이 세상 어디서나 볼 수 있습니다. 불교 신자 가운데도 정직한 사람이 있고, 무신론자 가운데도 이웃을 위해 평생을 바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윤리와 도덕이 어떻게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가 될 수 있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행함으로 자기 믿음을 확인하려는 것 역시 믿음이 없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십일조는 박하와 회향 같은 푸성귀까지 떼어 드렸고, 안식일 규정은 한 치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들보다 더 낫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은, 그들의 윤리와 도덕이 천국 앞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뜻입니다. 믿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선언입니다.
그렇다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는 어디에 있습니까? 믿음은 성도를 바로 그 자리로 이끕니다. 그곳은 자기의 악함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자리입니다. 내 행함이 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의가 나의 생명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자리입니다. 믿음이 우리에게 증거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돌아보면, 우리가 믿음의 증거를 이리저리 찾아 헤맸던 이유는 불안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정말 믿는 사람이 맞는지, 구원받은 것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응답을 세어 보고, 헌금 액수를 따져 보고, 하루의 선행을 점검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쌓은 증거물은 바람이 한 번 불면 무너지는 모래성이었습니다.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이런 증거를 찾지 않습니다. 병이 낫지 않아도, 사업이 기울어도, 자식이 기대에 못 미쳐도, 그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미 실상과 증거를 속에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가 붙들고 있는 것은 내 믿음의 크기가 아닙니다. 나를 대신해 의가 되어 주신 예수님입니다. 이 분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믿음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어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분명한 분입니다.
감나무 이야기에서 감은 눈에 보이니 누구나 따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열매는 눈으로 찾을 수도, 손으로 딸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믿음을 통해서만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열매를 맛본 사람은 이제 담장 위로 올라가 세상의 감을 찾지 않습니다. 이미 속에 증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당신이 붙들고 있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 것입니까, 아니면 보이지 않지만 이미 당신 속에서 일하시는 믿음입니까?
'신앙으로 사는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믿음은 무엇을 주는가 - 시체 앞에 선 사람들 (0) | 2026.09.30 |
|---|---|
| 믿음의 능력 - 겨자씨만한 믿음, 그리고 무익한 종 (0) | 2026.09.20 |
| 나를 안다는 것, 그리고 그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 (0) | 2026.09.10 |
| 거울처럼, 그러나 그리스도의 방패로 무례함 앞에 선 그리스도인 (0) | 2026.09.09 |
| 나쁜 말에 먹이 주지 않기, 무례함 앞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서야 하는가 (0) | 2026.09.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