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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으로

굶주림의 은혜, 기근의 복음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6. 8.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 간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누가복음 4:25~27)

성경의 모든 이야기, 인물, 사건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구속사로 수렴됩니다. 단순한 교훈이나 도덕적 이야기로 읽히지 않고,
‘나는 아니다’, ‘나는 죽을 자다’라는 절망 속에서만 참된 복음이 열릴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사렙다 과부처럼 자신의 마지막 남은 생명력조차 끝나가는 그 바닥에서야 비로소
“나는 도저히 안 되는 자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영원히 마르지 않는 밀가루와 기름으로 공급하십니다. 이 기근은 단순한 고난이 아니라 위대한 기근, 거룩한 결핍입니다. 은혜는 자기를 버릴 때 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 이야기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상징합니다. 사렙다 과부의 아들이 죽고 다시 살아난 사건은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치려 했던 아브라함의 사건과 연결되고, 엘리사 시대의 나아만 이야기 또한 율법으로는 깨끗하게 될 수 없음을 고백하고 말씀(요단)에 순종함으로 구원받는 은혜의 상징이 됩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회당 유대인들을 정면으로 고발했습니다. 예수님은
“과부는 이스라엘 밖의 사렙다에”, “문둥병자는 이스라엘 아닌 아람 나아만에게”라는 구약 이야기를 회당 유대인들에게 말함으로써, 이스라엘이 실제로는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인데, 스스로 의롭다고 착각하며 말씀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폭로하십니다.

말씀에 대한 반응이 그 사람의 실체를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이 복음적 진리의 말씀이 떨어졌을 때, 만약 회당 사람들이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었다면
“그러면 나 좀 고쳐주세요”라고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산 낭떠러지로 밀쳐 죽이려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의 정체입니다. 말씀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자기 의와 종교심으로 복음을 밀어내는 자, 그것이 마귀의 자녀입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산 위의 동네는 결국 복음에 의해 정체가 드러납니다. 빛이 비치면 위장된 종교, 위장된 의, 위장된 성전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진짜 빛으로 오시자, 율법주의적 예루살렘의 본모습이 노출되고 그들은 예수를 버리려 합니다. 산 위의 동네,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이었지만, 결국 복음을 밀어낸 곳입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을 ‘
풍성함’이나 ‘기름짐’으로 오해합니다. 기도하면 형통하고, 예배하면 성공하며, 하나님께 헌신하면 축복이 뒤따른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참된 복음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복음은 "굶주림"으로부터 시작되는 은혜의 이야기입니다.

사렙다 과부는 절망의 가장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남은 건 밀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 아이와 함께 마지막 떡을 나눠 먹고 죽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
바닥’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찾아옵니다. 말씀은 곧 생명으로 찾아옵니다. "먼저 나를 위해 떡을 만들어 오너라." 이 말은 단순히 선지자를 대접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이 더 이상 살아갈 힘이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라는 요청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고백, 곧 “나는 이제 죽을 수밖에 없는 자입니다”라는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라는 초청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과부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하나님의 기적은 시작됩니다. 퍼내고 퍼내도 마르지 않는 밀가루, 다 쓰고도 줄지 않는 기름,  하지만 이 복은 단지 육신의 풍요로 끝나지 않습니다. 진짜 기적은 그다음에 벌어집니다.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죽습니다. ‘육의 생명’이 꺾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이 다시 와서 아이 위에 엎드려 생기를 불어넣습니다. 새로운 생명이, 새로운 후손이 살아납니다. 그것은 더 이상 육으로 된 것이 아니라, ‘말씀’과 ‘생기’로 말미암은 삶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삭을 모리아 산에 바친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맞닿아 있습니다. 육신으로 낳은 자식, 자기 힘으로 얻은 성취를 칼로 꺾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대신물 앞에서 순종할 때 진짜 믿음의 자손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이스라엘 회당에서 하십니다. 자칭 하나님의 백성이라 부르는 그들 앞에서
“엘리야가 이스라엘에 많던 과부에게 가지 않고 사렙다 과부에게 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병자가 있었으나 엘리사가 고친 사람은 나아만 뿐이었다”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은 곧, "진짜 굶주림, 진짜 절망, 진짜 결핍 속에 있는 자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회당 낭떠러지로 예수를 밀어 죽이려 했습니다. 왜일까요? 그들은 자신이 과부임을, 자신이 문둥병자임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율법을 지키고, 제사를 드리며 스스로를 경건하게 유지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자신의 삶은 황폐하지 않다고, 아직도 쓸만한 밀가루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진짜 은혜는 그 ‘
밀가루 없음’에서 시작됩니다. 진짜 복음은 “나는 안 됩니다”라는 자리에서 터져 나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십자가를 주십니다. 자기 힘, 자기 공로, 자기 열심이 다 무너졌을 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떡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정체성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루살렘의 성전을 자랑하며
"나는 잘하고 있다"고 여기는 예루살렘 거민입니까? 아니면 밀가루 한 움큼 남은 황폐한 집에서 “나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렙다 과부입니까?

우리 모두는 하나님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시간도, 생명도, 구원도, 은혜도 내 안에서 길어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우리 힘으로, 신앙생활을 해내려 합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고, 봉사를 하고, 율법적 행위로 스스로를 가꾸며
"나는 여전히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의 열심과 가능성을 십자가로 단호히 꺾으십니다.

엘리사 앞에 섰던 나아만을 기억하십시오.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자신의 병을 인정하고 왔습니다. 나는 문둥병자입니다, 라는 자기 인식 하나로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반면 이스라엘에는 수많은 환자가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이 병자임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오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는 어떤 자아 인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고 있습니까? 나는 병자입니다. 나는 굶주린 자입니다.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자입니다, 라는 고백이 있습니까? 아니면
"나는 잘 하고 있습니다. 나는 괜찮습니다. 나는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라는 자존심이 있습니까?

그 자존심은 성령이 아닙니다. 그것은 프뉴마 아카다르토스, 곧 더러운 영입니다. 거짓 영입니다. 가짜 말씀입니다. 진짜 성령은 우리의 자존심을 무너뜨리고, 십자가 앞에 엎드리게 합니다.
“예수님, 나 좀 살려주십시오”라고 외치게 합니다.

이 시간 예수님은 묻고 계십니다.  
“너는 누구냐? 예루살렘의 산 위에서 자기를 자랑하며 남을 정죄하는 자냐, 아니면 굶주리고 목마른 사렙다 과부냐? 나의 생명을 간절히 원하는 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