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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으로

아브라함, 할례, 그리고 묵시적 구원의 표식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6. 8.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로마서 4:9~16)

아브라함의 의롭다 하심은 할례 이전이었습니다. 로마서 4장 10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묻습니다.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 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이 질문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 확인이 아니라, 구원이 인간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약속과 믿음에 근거한다는 복음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즉,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어떤 율법적 순종이나 외적 표식, 즉 할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그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할례는
'믿음으로 얻은 의'를 인치는 표식이었습니다. 로마서 4장 11절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음으로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할례는 믿음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이미 주어진 의에 대한 외적 확증, 사인(sign)입니다. 다시 말해, 그 자체로 효력이 있는 게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구원의 실재에 대한 상징적 확인, 즉 묵시의 역사화인 것입니다. 이것이 “인친다”는 개념의 성경적 의미입니다. 성령의 인침 또한 같은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미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를, 왜 굳이 이 역사라는 다른 차원에 만들어서 내려보낼까요?” 그 이유는, 묵시 속에 완료된 구원의 실재를 역사라는 시간 속에서 설명하고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인생은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이미 얻어진 구원을 보여주는 장(場)입니다. 이 점에서 당신은 역사를 "복기하는 장"으로 비유하며, 아주 탁월하게 본질을 짚습니다. 이는 곧 신자의 삶과 성화가 구원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실재를 드러내는 표식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게할더스 보스가 말한 것처럼, 종말론이 구원론에 선행하며 묵시(종말)의 현실이 역사를 해석합니다. 이는 성경적 구원 이해의 대전제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묵시 속에서 완성된 현실이며, 역사는 그 현실을 설명하고, 모형으로 드러내는 무대일 뿐입니다. 요한이 본 계시, 모세가 본 성막의 원형, 바울이 삼층천에서 본 실재는 바로 그 묵시의 현실입니다.

“당신의 옛 자아가 새 사람을 설명하는 모형입니다.” 당신은 삶 자체가 완성된 새 창조를 설명하는 모형적 실재임을 강조합니다. 마치 모형 비행기가 진짜 비행기의 구조와 형상을 설명하듯, 역사와 인간의 존재는 새 창조와 참 생명의 실재를 설명하는 도구입니다.
이 역사라는 모형은 복음의 실체를 비추는 그림자이며, 그러므로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왜 필요하고, 왜 전적인 창조로만 가능한지를 증명하는 역할을 합니다.

역사란, 완성된 나라를 드러내는 하나님의 복기입니다. 우리의 삶은 진보시키기 위한 공간이 아닙니다. 인간의 윤리적 성숙을 이루려는 노력도 아닙니다. 우리는 묵시 안에서 이미 완료된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기 위해 이 땅에 보내진 존재들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성령의 인침, 할례, 세례, 성찬 등을 통해 완료된 은혜의 실재를 역사 속에서 배우고, 설명하고, 드러내고 있는 중입니다.

이 역사는 창조된 모형으로서, 그 실재를 충분히 설명한 뒤에는 다시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묵시 속의 현실, 하나님 나라, 새 사람, 새 피조물은 영원한 현재로 존재하며, 어떤 보탬도 필요 없는 완전한 나라입니다.

한 명의 유명한 영화감독이 있습니다. 그는 완벽한 시나리오를 썼습니다. 대사 하나, 장면 하나 빠짐없이 이미 머릿속에서 모든 장면이 완성되어 있었고, 시나리오도 이미 끝났습니다. 이 감독은 그 작품이 완벽하게 어떻게 전개될지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깁니다.
“이미 시나리오가 완성됐다면, 왜 굳이 촬영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까? 감독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그 완성된 이야기를, 사람들의 눈에 보이도록 설명해 주기 위해서다.”

촬영은 그 자체로 영화의 가치를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촬영은 이미 완성된 이야기, 이미 감독 안에 있는 ‘
작품의 본질’을 관객들에게 ‘보이게’ 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배우들의 연기는 시나리오를 ‘설명’합니다. 편집, 조명, 음악은 이미 완성된 이야기를 ‘인친 것’처럼 증언해 줍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할례는 그의 믿음으로 이미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현실을 역사 속에서 설명해주는 장면, 상징적 행위인 것입니다. 그 자체로 의롭게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것을 확증하고, 인치는 표식인 것입니다.

할례는 효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실을 "
설명"하고 "증거"하는 역사적 행위입니다. 역사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이 얼마나 확실한지를 인치고, 증언하고, 설명하는 "복기 과정"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하나님 안에서 창세 전에 택정되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현실이 있음에도, 우리는 시간 속에서 그것을 배우고 경험하고 설명해나가는 인생의 장면들을 살아갑니다.

“왜 하나님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를 그냥 천국으로 데려가지 않으시고, 역사 속에서 고난도 겪고, 순종도 배우고, 할례도 행하게 하실까?”

그 이유는 우리가 사는 이 역사가, 묵시 속에서 이미 완성된 그 새 창조의 실제를 설명하고 증거해 나가는 드라마이기 때문입니다. 할례는 시나리오가 아니라 촬영 장면입니다. 시나리오는 하늘에 있고, 그걸 보여주기 위해 우리가 이 땅에서 연기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