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갈라디아서4:28~31)
갈라디아서 4장은 창세기의 사건을 끌어와 놀라운 복음의 그림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 이 둘은 단순히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율법과 은혜, 인본주의와 신본주의, 행위와 약속을 상징하는 두 언약의 그림입니다.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난 자, 인간의 열심과 계산에서 비롯된 결과입니다. 반면 사라에게서 난 이삭은 약속으로 난 자, 아무 능력도 없고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태어난 존재입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출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을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되묻는 복음의 질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율법주의를 ‘형식적인 규율’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인간의 노력과 의로 하나님께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이라 말합니다. 하갈은 애굽 여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라 인간의 지혜로 선택된 존재였고, 그녀를 통해 난 이스마엘은 끝내 이삭을 희롱하고 핍박합니다 (창 21:9).
이게 바로 율법주의의 본질입니다. 인간의 열심에서 나온 신앙은 반드시 은혜에서 난 신앙을 공격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 정의, 인권, 환경 보호, 평등, 선행, 의로운 분노, 개혁… 이 모든 주제들은 겉으로는 선하고 거룩해 보이지만, 그 기초가 복음이 아니라 인간 중심의 선의와 도덕성이라면 결국 은혜를 조롱하고 핍박하는 율법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은 분명히 말합니다.“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그 아들은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골라 쓰지 않으십니다. 백 명을 낳아도, 천 번을 애써도, 인간의 의로 포장된 열매들은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부 자기 의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는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쪼갠 고기 사이로 홀로 지나가셨습니다 (창 15장). 이는 하나님의 약속이 오직 하나님 한 분의 은혜와 능력으로 이루어진다는 상징입니다. 그 언약을 받은 아브라함이 하갈에게로 간 순간, 그는 복음에서 율법으로,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 돌아간 것입니다.
왜 육체를 따라 난 자는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할까요? (갈 4:29)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은혜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택, 오직 예수의 피, 오직 성령의 역사, 그것만이 유일한 생명의 이유이고 자랑거리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내가 뭔가 했다’는 자랑이 필요합니다. 기도 열심히 했고, 봉사 많이 했고, 정의 실현했고, 착하게 살았고... 그래서 ‘그 정도면 천국 가지’라는 위로를 받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네가 한 건 아무것도 아니야. 오직 예수로 충분해.” 그래서 인간은 복음을 미워합니다. ‘행위 없는 방종’이라 조롱하고, ‘책임 없는 믿음’이라 몰아갑니다.
하늘에서 난 자, 위에 있는 예루살렘의 자녀는 사라의 자녀입니다. 아무 능력도, 자랑도, 기대할 열매도 없는 그 상태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난 자입니다. 그는 핍박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업을 받습니다.
우리는 지금 하갈의 자녀인가, 아니면 사라의 자녀인가? 우리 신앙은 율법에서 난 것인가, 약속에서 난 것인가? 우리는 지금도 우리 자신을 자랑하려 애쓰고 있는가, 아니면 모든 자랑을 내려놓고 오직 예수의 피를 붙들고 있는가?
교회 안에 오래도록 헌신해 온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매일 새벽이면 누구보다 먼저 교회 문을 열었고, 주일이면 가장 늦게까지 교회에 남아 봉사하던 분이었습니다. 교회 식사, 성도 심방, 선교 헌금까지 누구보다 앞장서던 그분의 이름은 마치 교회의 ‘열심’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에 술집에서 일하던 한 자매가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세상에 찌들고, 사람들의 시선에 지쳐 방황하다가 예배 중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울며 회개했습니다. 성도들은 그녀의 진심에 감동했고, 목사님은 회심 간증의 기회를 주며 그녀를 격려했습니다.
그때, 집사님의 마음속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피어났습니다. “나는 이렇게까지 했는데… 왜 저런 사람을 칭찬하는 걸까? 내가 그동안 한 노력은 무시당하는 건가?”
이 갈등은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 마음의 중심에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선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율법의 자녀’의 정체성이 숨어 있었습니다. ‘나는 했기 때문에 받는다’는 생각, ‘저 사람은 자격이 없기에 칭찬받아선 안 된다’는 정의감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격 없는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열심이 아니라 약속으로 주어진다.”
갈라디아서 4장은 하갈과 사라, 이스마엘과 이삭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은 육신으로 태어나, 하나님의 약속 없이 인간의 수단으로 얻어진 자식이었습니다. 그는 약속으로 태어난 이삭을 조롱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갈 4:30)
율법 아래 있는 자, 행위로 자신을 세운 자는 결국 은혜의 자녀를 핍박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은혜는 자랑할 수 없고, 비교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랑이 무너지는 자리에 은혜는 역사합니다.
집사님의 열심은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 의로 굳어졌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는 자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도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종으로 만들지만, 복음은 우리를 자녀로 만듭니다. 율법은 우리가 쌓아야 할 자격을 요구하지만, 복음은 “아버지의 사랑”으로 모든 자격을 덮습니다.
“당신은 누구의 자녀입니까?” 오늘 다시 한 번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십시오. 나는 지금도 ‘하갈의 자녀처럼’, 내가 해온 봉사와 헌신, 나의 기도 시간과 열심을 앞세워 하나님께 인정받으려 애쓰고 있지는 않은가요?
혹은 ‘사라의 자녀처럼’, 아무 자격 없이 그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지하여 겸손히 그 앞에 무릎 꿇고 있는가요?열심을 내는 것은 귀합니다. 그러나 그 열심이 은혜를 거스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율법의 자녀는 행위를 자랑하지만, 은혜의 자녀는 십자가만을 자랑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사라의 자녀를 찾으십니다. 약속을 믿는 자, 자격을 버린 자, 자기 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의롭다 여김 받는 자, 그 자녀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약속의 자녀니라.” (갈 4:28)
오늘 당신은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율법의 자녀입니까, 은혜의 자녀입니까?교회 안에서 누구를 시기하고, 누구를 정죄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아무 자격 없는 자신을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의 은혜만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은혜만이 우리를 살립니다. 열심은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자격 없는 우리를 자녀 삼으신 하나님의 단 하나의 약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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