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로마서 2:6)
동양 사상의 핵심은 현재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인과응보적 윤리관에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철학이고, 이는 “지금 내가 어떤 존재로 살아가느냐”가 곧 미래의 나의 모습과 운명을 결정한다는 사상입니다. 여기에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기대도, 은혜에 대한 개념도, 죄에 대한 인식도 없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의 행위가 자기 삶을 만든다는 순환적 자율성에 기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로마서 2장의 말씀은 어떠한 관점에서 읽어야 할까요?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이 표현은 마치 동양 사상의 인과응보와 닮아 보입니다. '선하게 살면 상을 받고, 악을 행하면 벌을 받는다.' 그러나 성경의 메시지는 결코 도덕적 인과율이나 윤회적 자기완성이 아닙니다. 겉모양은 비슷하나, 그 내면은 정반대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행위에 따른 보응'은 인간의 자율성과 자격을 전제로 한 인연생기적 구조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와 주권에 따른 심판의 원리입니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요? 로마서 2장 6절부터 11절은 마치 "선을 행하면 영생을 받고, 악을 행하면 심판을 받는다"는 이분법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핵심 주장은 바로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으로 넘어가면 이렇게 선언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10, 23)
즉,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 '인간이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진리를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적 행위로는 결코 영생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지, 행위 구원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2장 11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사람의 혈통, 신분, 종교적 껍데기에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교회 안에 있든 밖에 있든, 하나님의 기준은 오직 ‘진리 앞에서의 삶’입니다. 겉으로 아무리 ‘선한 행위’를 했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진리를 따라 산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오히려 ‘불의’일 수 있습니다.
즉, 바울이 말하는 '선을 행함'은 단순한 도덕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서 비롯된 순종입니다.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난 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서 2장의 말씀은 행위구원론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인간이 스스로의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한 구절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행한 대로 보응하심”은 동양철학의 인과율처럼 순환적이고 자기완결적인 시스템이 아닙니다. 인간의 행위가 자기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의로 판단하신다는 ‘초월적 심판’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음입니다.
우리는 흔히 ‘인과응보’라는 말에 익숙합니다. “선을 행하면 복을 받고, 악을 행하면 화를 입는다.”는 이 단순하고 직관적인 사고방식은 동양 사회에 깊이 뿌리박혀 있습니다. 공자나 노자, 석가모니의 사상은 모두 이러한 도덕적 인과론을 전제합니다. 동양 철학은 이 세상에 벌어지는 모든 일에는 스스로의 원인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를 인연생기(因緣生起)라고 합니다. 내가 지은 원인으로 내가 결과를 받는다는 겁니다. 그 논리는, 그럴듯하고 논리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리일까요?
사도 바울은 로마서 2장에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고 말합니다. 얼핏 들으면 동양 철학의 인과응보와 같은 말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보응은 ‘자연의 법칙’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입니다. 즉, 하나님이 주체가 되시고, 그분의 뜻과 기준이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분은 인격적이며, 절대적인 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씀은 자연의 흐름 속에서 자율적으로 굴러가는 인과율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시고 심판하시는 사건입니다.
공자와 노자의 사상은 인간의 도덕성과 자연의 조화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하나 빠져 있습니다. 바로 초월자입니다. 동양 사상은 신(神)을 말하지만, 그것은 결코 살아계신 인격적 하나님이 아닙니다. 단지 자연의 기운, 우주의 흐름, 무(無)에서 나오는 생명력일 뿐입니다. 그것은 인격이 없고, 사랑도, 공의도 없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노자는 ‘무(無)’를 모든 존재의 시작으로 보았습니다. 무(無)는 보여지지 않고, 만져지지 않으며, 단지 존재의 근원이라고 추정할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존재의 근원은 무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말씀하시고, 일하시고, 사랑하시고, 심판하시는 인격적 존재이십니다. 그분이 계시기에 우리가 존재하고, 우리가 질문하고, 우리가 책임질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2장은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환난과 곤고가 임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자기 행위의 결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반응입니다. 즉, 인간의 선한 행위에 보상이 따르고, 악한 행위에 징벌이 따른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보응 개념은 자연법칙이 아닙니다. 그건 인격적인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결이며, 사랑의 통치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잘 살면’ 복을 받고, ‘못 살면’ 벌을 받는 기계적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며, 창조주 앞에서 책임을 지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 책임은 결국 그리스도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믿음 없는 성실함은 공허한 것입니다. 동양 철학은 성실함을 강조합니다. 도에 따라 살고, 무위의 삶을 추구하며, 도리를 다하고,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수련하는 삶을 이상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그 성실함은 결코 죄를 사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구원을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죄를 죄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죄란 윤회를 방해하는 장애이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범한 존재의 반역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선명하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3) 우리는 모두 죄인이며, 하나님 앞에 서야 할 심판의 날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민족으로, 철학으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십니다.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공자든 노자든, 선한 철학자든, 모두 한 분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게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자기 행위에 희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당신은 오늘 어떤 신을 믿고 있습니까? 보이지 않는 자연의 기운입니까? 아니면 인격적인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십니다. 그러나 그 행한 대로의 기준은 세상의 기준이 아닙니다. 철학의 잣대도 아닙니다.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 모두는 무너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만 새 생명이 시작됩니다.
착하게 산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정직하게 살았다고 평안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은 ‘도(道)’가 아니라 ‘예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길이신 예수, 진리이신 예수, 생명이신 예수. 그분을 믿고 따르는 것이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하나님, 제가 철학의 지혜나 인간의 성실함에 구원을 두지 않게 하시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만 참 생명과 의를 얻게 하소서. 나를 보응하시는 분이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그 앞에 엎드려 은혜를 구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성경 속으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 앞에서의 판단, 그리고 선한 행함의 본질 (0) | 2025.06.09 |
---|---|
내 안의 하갈을 내쫓으라 (2) | 2025.06.08 |
아브라함, 할례, 그리고 묵시적 구원의 표식 (0) | 2025.06.08 |
너의 역사와 너의 인생에 분노하라 (4) | 2025.06.08 |
굶주림의 은혜, 기근의 복음 (2) | 2025.06.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