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이것이 믿음에 속하기 위하여 은혜로 되나니…”(로마서 4:15~16)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로 여겨진 것이 율법이나 할례로 말미암은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그 믿음은 할례 이전의 것이었습니다. 이는 복음이 어떤 민족적 전통이나 인간의 행위, 제도에 의해 제한받지 않는다는 놀라운 선언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은혜로 주어진 약속,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삶의 자리에서 이 복음은 어떤 분노를 일으켜야 합니까?관용은 인간의 유익을 넘을 수 없습니다.
난민전 사건으로 수배를 당하던 중에 프랑스로 망명을 했다가 그곳에서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택시운전, 관광안내 등을 하면서 힘겹게 살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 이름이 홍세화 입니다. 남자입니다. 프랑스에서 운전을 하며 자서적 고백을 담은 ‘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라는 책을 썼고 그 책은 90년대 최고의 베스트 셀러에 올랐습니다. 그래서 돈 많이 벌었습니다. 일명 똘레랑스 신드롬을 일으킨 장본인 입니다. 똘레랑스는 프랑스어로 관용이란 뜻입니다. 그가 호구지책으로 택시 운전을 하면서 느낀 프랑스 저변의 스며들어 있고 뿌리 내려 있는 그 다양성과 타인에 대한 배려 등을 자서적 고백 형식으로 기록을 한 책인데 당시 그 책의 영향력이 실로 대단했습니다.
홍세화의 고백처럼, 프랑스는 관용의 나라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경제적 여유와 사회적 안정이라는 조건 아래서만 유지될 수 있는 ‘연극’ 이었습니다. 인간의 선과 휴머니즘은 언제든 자신의 유익에 반할 때 폭력과 분노로 탈바꿈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의 본질적 한계입니다.
인간이 만든 ‘정의’는 언제든지 나의 밥그릇 앞에서 무릎 꿇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사회의 분노이고, 곧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위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인생과 역사에 분노해야 합니다. 하나님 없는 선, 예수 그리스도 없는 인도주의, 복음이 제거된 정의는 결국 분열과 미움으로 치닫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은 진노를 일으키고, 복음은 믿음을 요구합니다. 본문 15절은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고 선언합니다. 율법과 제도, 윤리는 결국 인간의 죄를 드러내고, 분노하게 합니다. 사회정의, 관용, 인권이라는 이름 아래에서조차 이기적 분노는 더 큰 폭력을 낳습니다. 이것이 프랑스의 현실이며, 우리의 민낯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은혜에 속하기 위해 믿음으로 되는 것(16절)을 강조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분노해야 하지만 복음 앞에서 분노해야 합니다. 복음 없이 이 땅의 불의에 분노하는 것은 더 큰 불의를 낳고, 복음 없이 인간의 의로 세상을 바꾸려는 것은 바벨탑을 쌓는 일입니다. 믿음 없이 정의를 말하지 마십시오. 복음 없이 인권을 말하지 마십시오. 은혜 없이 분노하지 마십시오.
진짜 분노는 복음의 부재에 대한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분노조차도 인간 중심의 사상과 정치적 분열로 소모될 뿐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불의에 대한 공의이며, 이 진노에서 우리를 건져내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진짜 분노해야 할 대상은 복음을 제거한 종교, 복음을 무시한 신앙, 복음 없는 정의와 사랑입니다.
“내가 분노하는 이유는 정말 하나님의 진리를 위함인가, 아니면 내 밥그릇을 지키기 위함인가?”, “복음 없는 분노가 나를 지배하지 않도록, 나는 날마다 복음 앞에 무릎 꿇고 있는가?”
세상은 늘 분노합니다. 때로는 약자를 위해, 때로는 약자에게 분노합니다. 하지만 참된 분노는 죄에 대한 것이고, 진짜 의는 믿음으로부터 나옵니다. 복음 없는 인본주의는 결국 자기 위선의 탈을 벗게 됩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역사와 인생을 복음의 빛으로 바라보며 분노하십시오. 당신을 기만해온 인간의 선에, 당싱을 속여온 거짓 복음에, 당신을 위협하는 당신 자신의 율법에 분노하십시오. 그리고 그 분노를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믿음으로 다시 일어나십시오.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답게 말입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에서 우리는 두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는 장발장이고, 다른 하나는 자베르 경감입니다.
장발장은 굶주린 조카를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쳤다는 이유로 19년간 감옥살이를 합니다. 출소 후에도 사회는 그에게 다시 범죄자가 되라고 손가락질합니다. 그에게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은, 자신을 용서하고 은촛대를 선물한 한 주교의 복음적 은혜였습니다. 이후 그는 자수성가하여 많은 사람을 돕는 선한 삶을 살게 됩니다.
반면, 자베르는 율법의 사람이자 절대 정의의 수호자입니다. 그는 ‘법을 어긴 자는 끝까지 죄인’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장발장을 집요하게 추적합니다. 결국 장발장이 자신을 살려주는 모습을 보고도, 그 은혜와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자살을 선택합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법과 정의, 관용과 위선, 그리고 복음 없는 분노가 어디로 향하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자베르는 율법의 화신이었습니다. 죄인을 향한 은혜가 아닌, ‘옳음’만을 추구하는 율법의 정의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그 정의는 복음이 빠진 정의였고, 결국 그는 그 무게를 견디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자주 사회의 불의에 분노합니다. 때로는 정치적 부조리에, 경제적 불균형에, 약자에 대한 차별에 울분을 터뜨립니다. 그러나 묻지 않을 수 앖습니다. “그 분노는 복음으로부터 시작된 분노입니까? 아니면 내 안의 율법적 의로움과 자베르의 분노입니까?”
우리는 자주 자베르처럼 행동합니다. 정의를 말하지만, 정작 은혜는 잊습니다. 공의를 외치지만, 그 십자가의 피는 무시합니다. 그런 정의는 결국 사람을 살리지 못합니다. 오직 복음 안에서의 분노, 곧 불의와 죄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만이 참된 회복을 이끌어냅니다.
우리는 장발장처럼 복음의 은혜로 살아가는가, 아니면 자베르처럼 복음 없는 정의감에 사로잡혀 누군가를 정죄하고 있지는 않은가? “복음 없는 분노는 결국 자베르처럼 자멸합니다. 하지만 복음 안에서의 분노는 장발장처럼 새로운 생명을 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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