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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께 은혜를 입었다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9. 1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세기 6:5~8)

세상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창세기 6장의 장면은 오늘 우리의 세상과 닮아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끊임없이 자기 욕심을 따라 움직이고, 하나님을 떠나 자기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합니다. 세상은 발전하는 것 같지만, 그 속은 무질서와 혼돈, 갈등과 파괴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마음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다”는 말밖에 붙일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땅 위에 사람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시며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조화로웠던 창조 세계는 깨지고, 결국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역창조”가 닥쳐옵니다. 그 절정이 바로 노아의 홍수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세계가 물에 덮여 완전히 무너지는 장면은, 죄가 얼마나 무섭고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창세기 6장 8절은 결정적인 전환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그러나”라는 한 단어가 성경 전체를 꿰뚫는 복음의 요약입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멸망이 임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은혜를 잊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잊어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잊지 않으시고 찾아내십니다.

홍수의 심판은 끝장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물이 땅을 덮은 후, 비둘기가 감람나무의 새 잎사귀를 물고 온 것은 그 증거입니다. 시체로 뒤덮인 황폐한 땅에도 하나님은 새 생명을 싹트게 하셨습니다. 심판은 파괴가 목적이 아니라, 죄를 쓸어내고 새 창조를 준비하는 하나님의 도구였던 것입니다.

“그러나”의 은혜는 노아의 이야기에서만 멈추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가 이 패턴을 반복합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도, 그러나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고 언약을 깨뜨렸을 때에도, 그러나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온 세상이 죄로 죽을 수밖에 없을 때에도, 그러나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십자가는 가장 철저한 심판의 자리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버림받고 죽임을 당한 사건은 역창조의 끝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었습니다. 무덤에서 일어나신 예수님은 새 생명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러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우리는 여전히
“항상 악한 생각”에 휘둘리며 살 때가 많습니다. 내 힘으로는 절대 온전한 순종을 이룰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바로 거기에서 복음은 우리를 부릅니다. “그러나 은혜가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대신 순종하셨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두려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소망으로 나아갑니다. 심판의 메시지를 들을 때조차도 우리는 두렵기보다, 은혜의 소식을 듣습니다. 하나님은 무너진 자리마다 새 생명을 피워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시대처럼 세상이 혼돈 속으로 치닫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은혜로 사람을 부르십니다. 오늘도 내 삶 속에서, 내 가정과 교회 속에서, 나는 어디에서 하나님의
“그러나”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나의 연약함과 실패 위에, 그러나 은혜가 임합니다. 세상의 혼란과 절망 위에, 그러나 하나님은 새 창조를 시작하십니다. 죽음과 심판의 끝에서도, 그러나 예수 안에서 생명과 영원한 잔치가 준비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할 일은 단 하나입니다.
“그러나의 은혜”에 붙잡혀 사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열심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가 나를 살린다는 복음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