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창세기 9:13)
노아의 홍수 사건은 단순한 재앙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심판 속에 꽃피는 하나님의 은혜, 곧 ‘그러나’의 은혜를 드러내는 구속의 이야기입니다. 모두가 심판받아 마땅했지만, 하나님은 노아를 ‘은혜로 덮으심’으로 구원하셨습니다. 이 은혜의 중심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홍수 이후, 하나님은 노아와 그 자손들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그리고 구름 사이에 무지개를 두시며 언약의 표로 삼으셨습니다. 다시는 물로 세상을 멸하지 않겠다는 약속입니다. 무지개는 하늘과 땅 사이를 잇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진노의 구름 위에 세워진 은혜의 다리이며, 심판을 끝내시고 은혜의 시대를 여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표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의 언약 바로 뒤에 노아의 취함과 벌거벗음이라는 이상한 사건이 등장합니다. 노아는 포도주를 마시고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 누워 있었습니다. 그의 아들 함은 그 부끄러움을 보고 형제들에게 조롱하듯 알렸습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뒤로 물러서서 아버지의 수치를 덮어 주었습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가족 이야기나 도덕적 교훈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철저한 무능함과 타락의 반복성을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홍수 이후에도 인간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죄의 본성은 여전히 우리 안에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부끄러운 자를 덮으시고, 구원의 언약을 이어가십니다.
셈과 야벳이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덮을 때 사용된 단어 ‘캇싸(כסה)’는 단순히 가리다는 뜻을 넘어, “죄를 덮어 용서하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시편 32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2:1)
하나님께서 덮으신다는 것은, 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은혜로 그 위를 가리우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벌거벗음을 짐승의 가죽옷으로 덮으신 하나님, 출애굽의 밤, 어린양의 피로 문설주를 덮으신 하나님, 시내산에서 모세를 손으로 가리우신 하나님, 그 모든 사건은 결국 십자가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완성됩니다.
그분의 피가 우리를 덮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義)만이 비쳐 보일 뿐입니다.
노아의 방주는 심판의 물결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덮어 지켜 주셨습니다.
그 방주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방주가 세상의 물을 막아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했듯,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진노를 막아 우리를 덮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덮어 주신 사람은 복이 있다.” (롬 4:7)
그분의 덮음 아래에서만 우리는 안전합니다. 그분의 피가 우리의 옷이 되고, 그분의 의가 우리의 방주가 됩니다. 그러나 그 덮음을 거부한 자들에게는, 마지막 날 다시 진노의 파도가 밀려올 것입니다.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계 6:16) 하나님께 덮임을 받은 자는 복이 있지만, 스스로 가리려는 자는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무지개는 심판 후의 하늘 위에 떠 있는 은혜의 증거입니다. 그 끝에는 언제나 십자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덮으심으로 당신의 백성 삼으셨고, 이제 우리는 그 은혜의 무지개 아래에서, 다시는 멸망받지 않을 새 하늘과 새 땅의 약속을 붙잡고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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