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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이야기

그럴 수도 있잖아요 - 이해하는 마음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7. 22.

우리는 얼마나 자주 타인의 모습에 대해 '왜 저럴까?' 하고 속으로 평가하거나 입술로 비판합니까? 못 생겼다고, 늘 늦는다고, 욕심 많다고, 무식하다고, 눈치 없다고... 우리는 타인을 바라보는 눈에 얼마나 자주 엄격하고 차가운 잣대를 들이대며, 자신은 그 기준에서 예외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럴 수도 있잖아요.” 얼핏 들으면 너무 단순하고, 너무 무책임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 속에는 ‘이해’와 ‘공감’ 그리고 ‘자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우리의 모든 부족함과 실수와 모자람을 아시면서도 여전히 품으시며 하시는 말씀이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지. 내가 너를 아니까.”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여호와는 중심을 보시느니라"(삼상 16:7) 사람들은 외모나 모양, 태도를 보고 쉽게 평가합니다. 못 생겼다며 조롱하거나, 옷차림이나 몸가짐이 다르다 하여 선을 긋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겉모습이 아닌 중심을 보십니다. 창조주께서 각각을 다르게 만드셨다는 사실은 오히려 다양성과 아름다움의 증거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외모로 남을 흉보는 것은 곧 창조주 하나님의 솜씨를 비하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럴 수도 있잖아요.” 어쩌면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그리 지으신 존재일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삶에는 내가 모르는 고난과 사연이 숨겨져 있기에, 우리는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감정의 기복도 사람됨의 일부입니다. 예민하게 굴거나 쉽게 화를 내는 사람을 보면 우리는 불편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이 지난 밤 얼마나 잠을 설치고, 어떤 스트레스를 안고 살아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주님도 감정이 있으셨습니다. 성전에서 상을 뒤엎기도 하셨고, 나사로 무덤 앞에서 우셨습니다.

“피곤해서, 지쳐서, 외로워서 그럴 수도 있잖아요.” 진정한 신앙은 감정의 변화 속에서도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시작됩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고전 13:5). 우리가 주님을 닮아가고자 한다면, 누군가의 예민함을 정죄하기보다 감싸 안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약속에 자주 늦습니다. 또 어떤 이는 말귀를 잘 못 알아듣고, 실수를 반복합니다. 하지만 혹 그 사람의 삶이 매일 바쁜 업무 속에 시달리고, 여러 통의 전화를 처리하다 시간을 잊었을지도 모릅니다. 혹시 그가 한 번쯤 시계를 못 보았을 수도 있고, 그날은 유난히 마음이 분주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 우리는 불쑥 불쾌함을 표현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이 말은 타협이나 방임이 아닙니다. 은혜의 언어이며,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따뜻한 용납입니다.

지식이 부족한 사람,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사람을 우리는 때로 '
모자람'으로 여기지만, 하나님의 시선은 그 사람의 상황과 배경까지 꿰뚫어 보십니다. 예수님은 남들 눈에는 '죄인'처럼 보이는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고,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을 가장 귀한 헌금이라 칭찬하셨습니다.

어떤 이는 배울 기회를 얻지 못한 채 평생 살아왔을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자녀의 학비 때문에 입을 옷조차 사지 못하며 절제하는 삶을 사는 중일 수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잖아요.” 이 단순한 고백은, 우리가 더 이상 겉으로 보이는 것에만 반응하지 않겠다는 신앙적 결단입니다.

그럴 수도 있음을 아는 것이 곧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기의 의로 가득 찬 바리새인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타인을 판단하고 지적하는 동안, 우리 안에 교만이 자라고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럴 수도 있잖아요”라고 말하는 마음은 겸손한 자의 자리입니다. 이해하려는 태도는 나를 낮추는 연습이고, 이웃을 높여주는 예배입니다.

바울은
“서로 용납하고 피차 용서하라”고 했습니다(골 3:13). 신앙은 말씀을 많이 아는 것만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 곧 남을 판단하지 않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그럴 수도 있잖아요”는 말은, 상대를 위한 관용의 언어이며, 나를 위한 마음의 방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게 먼저 베푸신 은혜를 세상에 흘려보내는 방법입니다.

“그럴 수도 있지”는 복음의 언어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향해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의 이 말씀이야말로, 가장 깊고 넓은 “그럴 수도 있잖아요” 아닐까요?

우리가 날마다 복음을 입에만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낼 때, 우리도 누군가에게 그런 이해와 사랑의 시선을 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오늘도 누군가에게 말해보세요.
“그럴 수도 있잖아요.” 그 한마디가 누군가의 인생을 살립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에는 진정한 평안과 기쁨이 피어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