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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으로 사는 삶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보는 눈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2. 27.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편 119:18)                   

시편 기자는 간절히 구했습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이 짧은 기도 한 줄이 마음에 메아리칩니다. 그는 성경을 이미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글자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눈을 열어달라"고 구합니다. 무언가를 보고 있지만, 진짜로는 보지 못하는 상태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이 그 상태에 있습니다.

종교를 오해한 사람들은 신앙을 일종의 도덕 훈련소처럼 여깁니다.
"이것은 해야 하고, 저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 채찍과 공포로 사람을 움직이는 방식입니다. 이런 신앙 안에서 사람들은 지칩니다. 해야 할 목록은 끝이 없고, 하지 말아야 할 목록은 더 깁니다. 두려움으로 버티다가 결국 마음이 식어버립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은 전혀 다른 원리로 작동합니다. 강제가 아니라 매료됨입니다. 의무가 아니라 발견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려면, 연애 이야기만큼 좋은 예화가 없습니다.

어떤 남자가 딱히 목표도 없이 흘러가는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습니다. 기숙사 친구와 낚시를 가고, 사냥을 가고, 저녁엔 아무 생각 없이 TV를 보다 잠드는 생활이었습니다. 나쁜 삶은 아니었지만 그냥 그런 삶이었습니다.

어느 날 오후, 그는 장을 보기 위해 마트에 갔습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수요일 오후였습니다. 그때 그녀가 있었습니다. 통로 저편에서 그녀가 물건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남자는 멈췄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온몸이 멈춰버렸습니다. 달리던 기차가 벽에 부딪힌 것처럼. 숨이 잠깐 멎었습니다. 세상이 잠시 정지했습니다.

그 순간 이후, 그의 삶은 그녀를 보기 이전과, 본 이후로 나뉩니다.  낚시는 더 이상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친구들과의 운동 계획도 흐릿해졌습니다. 그의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던 온갖 것들이 갑자기 2순위로 밀려났습니다. 무언가 더 중요한 것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금껏 그것이 존재하는 줄도 몰랐습니다.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보았습니다. 친구들은 당황했습니다. 이전의 그가 아니었습니다. 억지로 데려가도 멍하니 딴생각을 했고, 무엇을 해도 눈이 다른 곳에 가 있었습니다.

그를 정말 사랑하는 친구라면, 마트에서 그를 끌어내어 트럭에 싣고 집으로 데려오는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 남자는 이미 다른 세계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규칙이 아니었습니다. 의무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한 번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움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에서 구원이란, 바로 그 순간과 같은 것입니다. 평생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고 살아온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에 다녀도, 성경을 읽어도 그냥 글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그의 눈에서 가리개를 벗기십니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주님의 영광을, 그 사랑의 깊이를, 그 아름다움을 보게 됩니다.

충격입니다. 말문이 막힙니다.
"이게 뭐지? 이런 것이 있었단 말인가?" 마치 밭을 갈다가 땅속에서 값진 진주를 발견한 사람처럼, 그 사람은 그 자리에서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팔고서라도 그것을 사려 합니다. 억지로가 아닙니다. 그 가치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기쁨으로 파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 그는 아침마다 무기력하게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커피 한 잔 사서 마시며 타성에 젖어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진주를 발견한 이후, 아침이 달라집니다. 눈이 떠지는 순간부터 마음이 뜁니다.
"오늘 그것을 가져와야 해." 의무감이 아니라, 간절함입니다.

새벽 4시에 눈이 떠집니다. 가족을 깨우지 않으려고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나갑니다. 혼자 조용한 방에 앉아 성경을 펼치고 기도를 드립니다. 무엇이 그를 그 새벽에 일으켰습니까? 규율이 아니었습니다. 벌에 대한 두려움도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영광이 그를 잡아당겼기 때문입니다. 보았기 때문입니다.

신앙 안에서 오래 살다 보면 이런 고백을 하게 되는 때가 옵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압니다. 그런데 하고 싶지가 않아요. 마음이 싸늘합니다." 이것은 게으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의지력의 부족도 아닙니다. 이것은 시력의 문제입니다.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은, 처음 보았던 그 아름다움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처방은 하나입니다. 더 많은 규율이 아닙니다. 더 무거운 의무 목록이 아닙니다. 그분의 얼굴을 다시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그 사랑의 깊이를,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그 신비를,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 희생을 다시 보는 것입니다. 정말 있는 가치 그대로, 왜곡 없이, 흐릿함 없이 다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의 기도가 다시 살아납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이것은 더 열심히 하겠다는 결단의 기도가 아닙니다. 보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흐릿하고 둔해진 눈을 열어달라는 간구입니다. 그 아름다움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볼 수 있다면, 나머지는 따라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월마트에서 그녀를 본 남자에게 더 이상
"낚시보다 그녀를 우선해야 한다"고 설득할 필요가 없었듯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