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시편 56:8)
어느 늦은 밤, 어느 권사님이 홀로 기도실에 앉았습니다. 특별히 슬픈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날 따라 유난히 기도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자리를 잡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눈물이 흘렀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치려 했습니다. 그러나 눈물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터져 나오듯, 소리도 없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그녀는 영문도 모른 채 그저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한참이 지나서야 기도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왜 그렇게 울었을까. 요즘 내가 감정이 너무 약해진 것일까. 그러나 며칠 후, 그녀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바로 그날 밤, 교회 청년 하나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멈추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청년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혼자 방 안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밤을 넘길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권사님은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흘린 눈물이 어디를 향한 것이었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습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라 불립니다. 그가 눈물을 흘린 것은 감수성이 남달리 예민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보았습니다. 자기 민족이 걸어가고 있는 길의 끝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등진 채 우상의 뒤를 쫓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침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끌려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보았습니다.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자기 나라가 불에 타는 것을 보면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강한 것이 아니라 이미 마음이 죽어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눈물은 자기 슬픔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슬픔이 한 사람의 몸을 빌려 흘러내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심판하시면서도 아파하셨습니다. 그 아픔을 담을 그릇으로 예레미야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날마다 울었습니다. 광장에서 울었고, 감옥에서 울었고, 기도할 때마다 울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습니다. 쓸모없는 예언자, 지는 편에 선 겁쟁이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물은 결국 역사 속에 남았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그의 눈물 어린 기도를 읽으며, 그 기도가 얼마나 깊은 곳을 건드리는지를 느낍니다. 눈물로 드리는 기도는 억지로 되지 않습니다. 울어야겠다고 마음먹는다고 눈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억지로 쥐어짜서 만들어낸 눈물은,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기도의 눈물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배우가 무대 위에서 흘리는 눈물과 어머니가 자식의 관 앞에서 흘리는 눈물이 같은 눈물일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은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솟아오릅니다. 기도 자리에 앉는 순간 이미 눈물이 고이기 시작합니다. 특별히 슬픈 기도제목이 없어도 눈물이 흐릅니다. 남의 일을 위해 기도하는데, 마치 자기 일인 양 통곡이 나옵니다. 이것은 감수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평소에는 좀처럼 눈물을 보이지 않던 사람이 기도할 때만큼은 한없이 우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대로 평소에 눈물이 많은 사람이라도, 기도 자리에서 흘리는 눈물과 일상의 눈물이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을 스스로 압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어떤 사람에게 이런 눈물의 은혜를 주시는 것일까요? 이 세상에는 울어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일들 앞에서 아무도 울지 않습니다. 모두 바쁘고, 모두 지쳐 있고, 모두 자기 문제만으로도 버겁습니다. 어느 가정이 무너져가고 있어도, 어느 청년이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있어도, 어느 노인이 아무도 모르게 외로움 속에서 죽어가고 있어도, 그 슬픔 앞에서 함께 울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성경은 우는 자와 함께 울라고 말합니다(로마서 12:15). 그러나 현실에서 그 말을 실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빈자리를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찾으십니다. 저 가정을 위해 울어줄 사람, 저 영혼을 위해 눈물로 기도해줄 사람을 찾으시면, 성령께서 그에게 임하셔서 눈물을 허락하십니다. 그 눈물은 단순한 감정의 표출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이 한 사람을 통해 이 땅에 흘러내리는 통로입니다.
이런 눈물의 기도를 감당하는 사람은 대개 인생의 연륜을 지닌 이들입니다. 교회에서 오랜 세월 권사로 섬겨온 분들 가운데 이런 은혜를 받은 이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눈물로 기도하려면, 먼저 아픔을 알아야 합니다. 아픔을 알려면 삶을 살아봐야 합니다.
젊을 때는 모릅니다. 세상이 때로 이유 없이 잔인하다는 것을, 착하게 산다고 해서 고통이 비켜가지 않는다는 것을, 어떤 슬픔은 말로 설명할 수 없고 어떤 상처는 평생 아물지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수십 년의 세월을 지나온 사람은 압니다. 사람마다 저마다의 무게를 지고 산다는 것을, 겉으로 웃고 있는 사람도 안으로는 울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그 앎이 눈물의 기도를 가능하게 합니다.
어느 시골 교회의 집사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젊은 시절 아이를 잃은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기도할 때마다 이유 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처음에는 당혹스러웠습니다. 슬픔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그 눈물이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도 중에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었습니다. 아무 연락도 없이 오래 소식이 끊긴 교인, 최근 힘들다는 말을 무심코 흘린 이웃,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 그들을 위해 울었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면, 그날 그 시간에 그들이 가장 힘든 고비를 넘기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눈물의 기도를 하는 사람은 때로 오해를 받습니다. 감정이 너무 풍부한 사람, 혹은 나약한 사람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공예배 자리에서 혼자 울고 있으면, 주위의 시선이 느껴집니다. 왜 저렇게 울까, 무슨 일이 있나, 그러나 정작 그 눈물로 인해 누군가의 삶이 버텨지고, 어느 가정이 무너지지 않고, 어느 영혼이 어둠에서 건져지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눈물을 흘린 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을 때가 많습니다. 어쩌면 영원히 알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을 기억하십니다.
시편 기자는 고백했습니다.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시편 56:8).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흘린 눈물을 병에 담아두시는 분입니다. 그 눈물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오늘도 어딘가에, 이유를 알 수 없이 기도할 때마다 눈물이 흐르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감정이 약해진 것이 아닌가 스스로 의아해하면서도, 멈출 수 없어서 그냥 울면서 기도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 눈물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선택하셔서 맡기신 사역입니다. 말로 전하지 못하는 긍휼을, 손으로 닿지 못하는 위로를, 눈물로 드리는 기도가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울었을 때, 그 눈물은 단지 한 민족의 슬픔을 담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이 땅에 흘러내린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성령께서는 그런 눈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찾고 계십니다. 아픔을 알고, 사람을 알고,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 그 사람을 통해 이 세상의 슬픔이 하나님 앞에 올려지고, 하나님의 긍휼이 이 땅 위에 내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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