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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으로 사는 삶

십자가를 진다는 것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5. 9.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태복음 16:24)

어느 날 한 노인이 병원 로비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누군가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오랫동안 암 투병을 해온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사진을 보며 감동을 받았고, "
저분은 참으로 십자가를 지고 사는 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암을 앓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일까요?

우리는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해왔습니다. 고질적인 질병, 버거운 가난, 속을 썩이는 배우자나 시댁, 이런 것들을 '
내 십자가'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십자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오해를 걷어내지 않으면, 우리는 평생 교회를 다녀도 복음의 핵심에 닿지 못한 채 살게 됩니다.

먼저 우리가 잊고 있는 사실 하나를 되짚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원래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금으로 만들어 목에 걸고, 교회 첨탑 위에 빛나게 세워놓는 것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십자가는 로마 제국이 반역자들에게 가하는 공개 처형 도구였습니다. 때로는 수십, 수백 명이 한꺼번에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길가에 늘어선 십자가들, 그 위에서 며칠씩 죽어가는 사람들, 그것이 당시 사람들이 '
십자가'라는 단어에서 떠올리던 장면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지나가던 사람들은 감동하지 않았습니다. 침을 뱉고, 고개를 저으며, 비웃었습니다. "
저것 봐, 또 한 명의 실패자." 그 자리가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그 처참하고 수치스러운 자리에서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이루었다는 말입니까? 이 물음에 답하지 않으면 십자가는 영원히 수수께끼로 남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한 가지를 공통적으로 가르칩니다. 인간이 스스로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수행을 통해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세속을 등지고 산으로 들어갑니다. 욕망을 끊고, 자아를 비우는 훈련을 합니다. 그 금욕과 수행이 쌓이면 마침내 깨달음에 이른다고 합니다. 또 다른 종교들은 신과 인간이 손을 맞잡고 협력하면 원하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길은 전혀 다릅니다. 성경은 인간의 가능성을 키우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 스스로는 결코 그 길을 갈 수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길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길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그 길이 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예수님이 오시면 사람들이 서로 더 사랑하고 화목해질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반대를 말씀하십니다. 가족 사이에 불화가 생기고, 원수가 바로 내 집 안에 있게 된다고 하십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인간의 모든 행동 밑에는 자기 사랑이 있습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것도 자기 사랑의 확장이고,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것도 자기 사랑이 더 넓은 단위로 펼쳐진 것입니다. 영웅적 희생조차도 그 뿌리를 파고들면 어떤 의미에서 자기 자신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자기 사랑의 구조 자체와 충돌하십니다. 그래서 검이 옵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과 자기 사랑의 방식대로 살려는 사람 사이에 분열이 생깁니다. 그 분열이 때로는 가장 가까운 가족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부모를 버리는 것도 어렵습니다. 자식을 버리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십니다.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라고 하십니다.

누가복음 14장에서는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멈춰야 합니다. 자기 목숨을 미워하면서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결단하는 것조차 자기 의지의 행위 아닙니까? 영생을 얻기 위해 목숨까지 버리겠다는 것도 결국 더 큰 자기 이익을 위한 선택이 됩니다. 인간은 이 딜레마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자기를 버리려는 행위조차 자기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더 강한 금욕과 더 철저한 자기부인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렇게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
너는 할 수 없다."

베드로를 보면 이것이 선명해집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는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은 이 고백이 베드로 자신의 능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네게 알게 하셨느니라." 베드로는 그 순간 자신이 특별한 계시를 받은 사람이라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직후,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시자 베드로가 나섭니다. "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님을 위한 충정이었습니다. 진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진심에 대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왜입니까? 베드로의 생각은 인간의 방식으로 예수님을 이해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난 없이, 십자가 없이, 죽음 없이 메시아가 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이었고, 그 사람의 일이 곧 사탄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베드로야, 네가 나를 위해 하려는 그 모든 것은 이미 죽은 것이다. 그러니 이제 네 뜻으로 나를 따르려 하지 마라.' 그 말씀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베드로는 곧 증명하고 맙니다. 다른 사람은 다 배반해도 자신만은 절대 배반하지 않겠다고 큰소리쳤던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세 번이나 저주하고 맹세하며 부인했습니다. 닭 우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을 때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었습니다. 자기 뜻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 이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은 무너진 베드로에게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 이후 베드로의 삶을 예수님은 요한복음 21장에서 이렇게 묘사하십니다. "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젊은 날 베드로는 자기 의지로 살았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가고 싶은 곳을 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릅니다. 남이 그를 묶고,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갑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의 실제 모습입니다.

그것은 더 강한 의지로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뜻이 꺾이고, 주님의 뜻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기획한 신앙생활이 아니라,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는 삶입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삶이 흘러갈 때, 그리고 그 흐름 속에서 주님의 손을 붙드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생 지고 살아온 것들인 병, 가난, 힘든 관계, 그것들이 고통스럽고 무겁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님을 떠난 인생이 짊어질 수밖에 없는 것들이지, 예수님이 말씀하신 십자가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십자가는 훨씬 더 근본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내 의지와 내 열심과 내 종교적 노력이 하나님 앞에서 죽는 자리입니다. 내가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보려는 모든 충동이 내려놓아지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서 비로소 주님이 이끌기 시작하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내가 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아가 더 이상 삶의 주인이 되지 않겠다고 내려놓을 때, 주님이 그 십자가를 내 위에 덮어오시는 것입니다. 그 무게는 내가 상상하던 것과 다릅니다. 예수님은 "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끌려가는 삶, 그러나 주님이 끌고 가시는 삶이 새 언약의 삶이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의 실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