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매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 부대에 물을 채워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창세기 21:1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하고 헌신하며 하나님의 일을 시작했는데, 정작 가장 필요한 것이 채워지지 않는 경험을 하신 적 있으십니까? 분명히 하나님께 구했고, 분명히 믿음으로 나아갔는데, 문은 열리지 않고 물은 나오지 않는 그 자리에서 이런 질문이 터져 나옵니다.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가 잘못한 것입니까?"
"왜 이렇게 어려움이 계속됩니까?"
이 질문은 오늘 우리만의 질문이 아닙니다. 수천 년 전, 광야 한복판에서 한 여인도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여인에게 놀라운 방식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합니다.
하갈은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난 여인입니다. 그녀는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브엘세바 광야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이 광야는 오늘날에도 낮 기온이 40도를 훌쩍 넘는 혹독한 사막 지대입니다. 먹을 것도 없고, 마실 것도 없었습니다. 가죽 부대의 물이 다 떨어지던 날, 하갈은 아이를 수풀 아래 두고 멀찍이 떨어져 앉았습니다. 그리고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성경은 이 장면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다 하고…울었더라"(창 21:16) 이것은 단순한 슬픔이 아닙니다. 이것은 절망입니다. 방법이 없다는 확신,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체념입니다. 하갈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 하나님의 천사가 하갈에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창 21:17) 그리고 결정적인 장면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매 샘물을 보고…"(창 21:19)
여기서 우리는 반드시 이 말씀을 깊이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자리에 새로운 우물을 만들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이 그 순간 우물을 창조하셨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우물은 이미 거기 있었습니다. 하갈이 아이를 두고 울고 있는 그 자리, 죽음밖에 보이지 않던 그 광야에, 샘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달라진 것은 딱 하나입니다. 하갈의 눈이 열렸습니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은 다릅니다. 이 진리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그대로 작동합니다. 어느 심리학 연구에서 실험 참가자들에게 농구 경기 영상을 보여주며 "흰 옷을 입은 선수들이 몇 번 패스하는지 세어보라"고 했습니다. 참가자들이 패스 횟수를 열심히 세는 동안, 영상 한가운데에 고릴라 복장을 한 사람이 유유히 걸어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참가자의 절반가량이 그 고릴라를 전혀 보지 못했습니다. 눈은 멀쩡히 뜨고 있었지만, 특정한 것에 집중하느라 다른 것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갈의 문제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녀의 두 눈은 정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오직 죽음만 보고 있었습니다. 물이 없다는 사실, 희망이 없다는 현실, 이 두 가지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바로 곁에 있는 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새 우물을 파주신 것이 아니라, 하갈의 눈을 여셔서 이미 있는 우물을 보게 하셨습니다.
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대대로 물려받은 낡은 땅을 일구며 살았지만 늘 가난했습니다. 씨를 뿌려도 수확이 시원치 않았고, 비가 오면 지붕이 새고, 겨울이면 난방도 제대로 못 했습니다. 그는 매일 밤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왜 나는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가…"
그런데 어느 날, 이웃 마을에서 지질학자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그 땅을 살펴보던 그가 말했습니다. "이 땅 아래에 지하수가 흐르고 있을 것 같습니다. 한번 파보시겠어요?"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땅을 파기 시작했고, 몇 미터 내려가자 맑은 물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그것도 한 집이 사용하기에 넘치는 양이었습니다. 농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습니다. 평생 목마름으로 울었는데, 사실은 그 발아래에 샘이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준비해 놓으신 것이 우리 발아래 있는데, 아직 우리의 눈이 열리지 않아서 보이지 않을 뿐일 수 있습니다.
창세기 26장에는 이삭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파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계속 생겼습니다. 첫 번째 우물을 팠더니,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빼앗았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우물을 팠습니다. 이번에도 다툼이 생겼습니다. 이삭은 그 우물 이름을 '다툼'이라고 불렀습니다. 세 번째 우물을 팠습니다. 이번에는 다툼이 없었습니다. 이삭은 그 이름을 '르호봇', 곧 '넓은 곳'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우리가 이 땅에서 번성하리로다" (창 26:22) 이삭의 신앙은 단순하고 강인했습니다. 막히면 다시 팠습니다. 빼앗기면 또 팠습니다.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결국 그에게 '넓은 곳'을 허락하셨습니다.
어떤 분은 이런 생각을 하실 수 있습니다. "계속 시도했는데 안 되는 것은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 아닌가요?" 물론 하나님이 특정한 방향을 닫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삭의 경우를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막은 것이지 하나님이 막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삭은 그것을 구분했습니다. 사람이 방해하는 것과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을 분별하면서, 그는 계속해서 팠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이 분별력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훈련하시는 과정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방향을 바꾸라는 신호인가?" 이 질문을 기도 가운데 품고 나아가는 것, 그것이 이삭의 믿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사실 '없음' 자체가 아닐 때가 많습니다. 기다림이 힘든 것입니다. 언제 주실지 모른다는 불확실함이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통해 우리가 반복해서 확인하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연은 거절이 아닙니다.
요셉은 총리가 되기까지 13년을 기다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기까지 25년을 기다렸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을 기다렸습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이 낭비였습니까? 아닙니다. 그 시간이 그들을 빚었습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실 그릇으로 만들어갔습니다.
실제로 우물은 얕게 팠을 때보다 깊이 팠을 때 더 맑고 좋은 물이 나옵니다. 표면의 물은 쉽게 오염되지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물은 오랜 세월 정화된 물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쉽게 얻어진 것으로 이루어진 신앙은 쉽게 무너집니다. 그러나 기다림 속에서 단련된 믿음, 막힘 앞에서도 파기를 멈추지 않은 신앙은 깊은 우물처럼 오래도록 풍성한 물을 냅니다. 하나님이 지금 여러분에게 하시는 일이 혹시 이것은 아닐까요? 얕은 우물이 아니라, 깊은 우물을 만들고 계신 것은 아닐까요?
요한복음 4장에는 수가 성 우물가의 여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여인도 매일 물을 길러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예수님은 땅의 물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갈증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영혼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목마름,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채우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이 교회를 통해 단순히 육신의 필요를 채우는 곳을 만들려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교회가 생명의 물이 흘러가는 통로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에스겔 47장에는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와 처음에는 발목까지, 그 다음에는 무릎까지, 그 다음에는 허리까지, 마침내 헤엄쳐야 할 강이 되는 환상이 나옵니다. 그 물이 닿는 곳마다 죽어 있던 것들이 살아났습니다.
지금 이 교회가 겪고 있는 어려움은 혹시 하나님이 그런 강을 준비하시는 과정이 아닐까요? 작은 실개천이 흐르기 전, 그 통로가 먼저 깊이 파여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자리를 이렇게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잘못했다. 하나님이 막으셨다. 이제 끝이다." 대신 이렇게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더 큰 것을 준비 중이시다. 눈을 열어주실 때가 오고 있다. 지금은 과정이다." 하갈이 울고 있던 그 자리에 이미 샘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눈을 열어주셨을 때, 그녀는 보았습니다. 그리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동일하게 일하십니다. 지금은 안 보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적게 나올 수 있습니다. 지금은 답답하고 낙심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 붙드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시면, 반드시 보게 됩니다. 함께 이렇게 기도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없는 것을 달라고 하기 전에 이미 주신 것을 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눈을 밝혀 주시고, 이 자리에 숨겨진 하나님의 샘을 보게 하여 주옵소서. 기다림이 힘들 때에도 파기를 멈추지 않는 이삭의 믿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이 교회가 단순히 물을 얻는 곳이 아니라, 생명의 물을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물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여시는 그날, 우리는 반드시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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