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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기도는 왜 종종 응답되지 않는가 - 로마에 가지 못한 사도의 이야기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 17.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로마서 1:11~15)

사도 바울은 로마에 가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편지 속 문장들은 차분한 신학자의 문체가 아니라, 마음이 앞서 뛰는 사람의 고백처럼 보입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한다.” “여러 번 가고자 했다.” 헬라어 원문에서 ‘원한다’라는 말은 단순한 바람이 아닙니다. 숨을 몰아쉬며 매달리는 갈망입니다. 기도로 밤을 새우는 사람의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바울을 로마로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바울이 원한 방식으로는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은 복음 전도자로, 교회를 견고히 세우는 사도로, 자유로운 몸으로 로마에 들어가기를 꿈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죄수의 신분, 쇠사슬에 묶인 몸으로 로마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바울은 복음을
“성공적으로” 전한 것이 아니라
순교로 생을 마쳤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실패입니다. 기도 응답의 관점에서 보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기도한 대로 되지 않았고, 원하던 사역의 열매도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역사는 정반대의 평가를 내립니다. 바울이 죽은 그 로마 제국이 결국 복음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바울의 성공적인 사역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바울의 철저한 무력함을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기도하면 길이 열려야 한다, 간절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셔야 한다, 응답되지 않으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생애를 보면 이 공식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는 병을 고쳐 달라고 간구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전도하러 가겠다고 기도했지만 길이 막혔습니다. 심지어 성령께서 직접
“가지 말라”고 막으셨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그는 기도를 하나님의 계획을 바꾸는 수단으로 이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관철시키는 도구가 아니라 자신의 뜻이 무너지는 자리였습니다. 우리는 종종 기도를
“하나님을 설득하는 시간”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 속 기도는 대부분 “내가 설득당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조차 겟세마네에서 “이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의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응답은 잔이 옮겨지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십자가로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가고 싶었던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런데 이상합니다. 로마 교회는 이미 복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온 세상에 전파되었다”고까지 평가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또 복음입니까? 이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나는 이미 믿는데 왜 또 복음을 들어야 하지?”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믿음은 자동으로 견고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로마 교회는 사도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평범한 신자들, 무역업자들, 이방인들에 의해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된 공동체였습니다. 그만큼 열정은 있었지만 교리는 약했고 자기 이해는 여전히 세상적이었습니다. 복음이 처음 들려질 때는 사람을 살립니다. 그러나 복음이 지속적으로 들려지지 않으면 사람은 다시 자기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미 믿는 사람들에게 다시 복음을 전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들을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성숙을 이렇게 오해합니다. 더 착해지는 것, 더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 더 종교적으로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성숙은 정반대입니다. 성숙이란 자신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열심이 많았지만 바울은 그들을
“젖 먹는 아이”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전히 자기 생각, 자기 판단, 자기 열심을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성숙한 사람은 점점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믿을 수 없다, 나는 의지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 남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성화입니다. 행위가 많아지는 성화가 아니라 자아가 사라지는 성화인 것입니다.

어떤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10년이 되었고 우연히 10년 전 자신이 쓴 일기장을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그 일기장에는 비전, 꿈, 성공, 결단, 헌신이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큰 일을 하겠다” “이 세상을 바꾸겠다” 그런데 최근에 쓴 글은 전혀 달랐습니다. "나는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사람인가, 은혜가 아니면 하루도 살 수 없다, 내 믿음이 아니라 주님의 붙드심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그는 스스로를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나는 나아진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세상을 보는 눈은 완전히 달라졌구나.” 그렇습니다. 성숙은 자신이 대단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에 가서 그들을 위로하고 동시에 자신도 위로받고 싶어 했습니다. 이 위로는 성공담을 나누는 위로가 아닙니다.
“요즘 잘 된다”는 위로도 아닙니다. 같은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위로입니다. 이 길은 외롭습니다. 자기부인의 길은 인기 없습니다. 그래서 참 신앙인은 언제나 소수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만 만나도 “아, 나만 미친 게 아니었구나” 그 위로 하나로 다시 걸어갈 힘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동지들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기도를 꺾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사도의 사역이 아니라 사도의 믿음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가장 선한 계획을 무너뜨리십니다. 가장 그럴듯한 기도를 거절하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알게 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구나.” 그 깨달음이 가장 깊은 응답이며 가장 완전한 구원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