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내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로마서 1:9~10)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얼굴도, 이름도, 성향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들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했다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자신을 그들에게 “빚진 자”라고까지 표현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됩니다. 도대체 무엇이 사람을 이렇게까지 만들 수 있을까?
보통 우리의 사랑은 조건을 가집니다. 자주 보는 사람, 정이 든 사람, 나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에게 마음이 갑니다. 연락이 오고, 오해가 생기고, 거리가 멀어지면 사랑도 함께 식어 버립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같은 교회에서 오랫동안 함께 예배를 드리던 성도가 어느 날 교회를 떠났다고 합시다. 처음에는 걱정하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마음에서도 멀어집니다. “본인 선택이겠지.” “내가 어쩔 수 있나.” 이렇게 우리의 관심과 사랑은 서서히 줄어듭니다.
그런데 바울의 사랑은 전혀 다릅니다. 그는 로마 교회 사람들을 본 적도 없고, 그들로부터 어떤 유익도 받은 적이 없으며, 앞으로 만나게 된다 해도 핍박과 고난만 기다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이 말은 바울이 감정적으로 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맹세할 수 있을 만큼 진실한 고백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랑은 인간적인 호감이나 성격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사랑은 복음에서 비롯된 사랑입니다.
우리는 흔히 말합니다. “전도가 중요하다.” “선교에 열심을 내야 한다.” “바울처럼 불타는 열정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성경은 한 번도 열심을 먼저 요구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죽음을 먼저 말합니다. 바울의 사랑은 성격이 뜨거워서가 아닙니다. 그의 사랑은 자기 자신이 철저히 무너진 자리에서 흘러나온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자신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다.” 이 말은 과장이 아닙니다. 바울의 삶은 실제로 그러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존경받던 바리새인이었고, 율법으로는 흠이 없다고 자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난 이후, 그의 모든 이력과 자랑은 오히려 짐이 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얼마나 쓸모없는 자인가”를 고백합니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진리가 하나 드러납니다. 사랑은 내가 커질 때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너질 때 시작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흔히 교회 숫자가 늘어나는 것, 사역이 확장되는 것, 영향력이 커지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생육과 번성은 그와 정반대의 길에서 시작됩니다. 노아의 방주를 떠올려 보십시오.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 세상에서 생육과 번성이 시작되는 순간, 정결한 짐승이 먼저 제물이 되어 죽습니다. 죽음이 먼저인 것입니다. 그 후에 생명이 이어집니다.
에스겔 36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번성케 하시겠다고 하시면서 그 방법을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더러운 것을 씻기고,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십니다. 이것은 숫자의 문제가 아닙니다. 존재의 변화입니다. 생육과 번성은 육적 자아의 죽음과 새 생명의 탄생입니다.
예수님은 “땅 끝까지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시기 전에 당신이 먼저 그 길을 가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무너뜨리시며 자기 자신이 참 성전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유대에서 니고데모에게 모든 종교적 자격을 부정하셨습니다. 사마리아에서 여인에게 자기 생명을 생수로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방 땅에서 믿음으로 사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모든 발걸음은 십자가를 향한 발걸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육과 번성은 사람을 모으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내어주는 데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 교회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돌에 맞아 죽습니다. 스데반입니다. 그의 죽음 이후 교회는 흩어집니다. 그리고 복음은 전진합니다. 누군가의 죽음 위에 누군가의 생명이 피어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방식입니다.
바울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로 가면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가고 싶어 했습니다. 왜입니까? 그의 안에 있는 복음은 나누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의무가 아니라 존재의 자연스러운 흘러넘침이었습니다. 육적 자아가 무너진 자리에서 하늘의 사랑이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그는 보지 못한 교회를 위해 기도할 수 있었고,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을 향해 “내가 빚진 자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여전히 무언가를 이루어야 사랑할 수 있고, 유익이 있어야 헌신할 수 있으며, 인정받아야 열심을 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다른 길로 부르십니다. 먼저 무너지라고 하십니다. 먼저 비워지라고 하십니다. 먼저 죽으라고 하십니다. 그 자리에서만 바울의 사랑이 시작됩니다.
혹시 요즘, 마음이 답답하고 사랑이 메말라 있고 기도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패의 신호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생육과 번성이 시작되는 자리일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 없는 존재로 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다만, 자기 사랑으로 가득 찬 존재를 십자가로 비우실 뿐입니다. 그리고 그 빈 자리에서 하늘의 사랑을 흘려보내십니다. 그것이 바울의 사랑이었고, 교회의 사랑이며,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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