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로마서 1:9~11)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 매우 독특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는 “열심으로”, “헌신으로”, “사역으로” 섬긴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긴다.” 이 말 한마디 속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하나님 섬김’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담겨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섬김은 인간의 결심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의지나 열심이나 헌신의 크기에서 시작되지도 않습니다. 그 섬김의 출발점은 오직 하나, ‘그의 아들의 복음’입니다.
신령한 은사는 ‘무언가를 하게 만드는 능력’이 아닙니다. 바울은 복음을 “신령한 은사”라고 부릅니다. 헬라어 프뉴마티코스, 곧 성령에게서 비롯된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더 잘하게 만드는 도구가 아닙니다. 복음은 우리를 더 열심 있는 종교인으로 업그레이드하는 장치도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은, 우리가 그동안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며 붙들고 있던 모든 기준을 무너뜨립니다. 복음이 임하면, 사람은 갑자기 하나님을 잘 섬기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착각해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복음은 은사이면서도 동시에 위기인 것입니다. 자기 의로 서 있던 모든 구조가 붕괴되기 때문입니다.
심령으로 섬긴다는 것은, ‘자기 의가 파산되는 자리’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내 심령으로 섬긴다.” 여기서 ‘심령’은 감정이나 열정이 아닙니다. 그 단어의 뿌리는 프뉴마, 곧 성령입니다. 심령으로 섬긴다는 말은, 성령에 의해, 성령으로부터 시작된 섬김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반대편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성령이 아닌 다른 것으로 섬기는 하나님 섬김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자신이 바로 그 섬김의 대표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0장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 하였다.” 열심이 문제였던 것이 아닙니다. 헌신이 부족했던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그 모든 섬김의 주체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는 것입니다.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한 섬김, 자기를 증명하기 위한 헌신, 자기 확신을 유지하기 위한 열심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기를 섬기는 종교 행위일 뿐입니다.
왜 어떤 신앙은 죽음 앞에서 무너지는 것일까요? 목회 현장에서 우리는 이 차이를 아주 적나라하게 목격하게 됩니다. 평생을 교회에 바쳤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의 마지막은 하나같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죽음 앞에서도 평안합니다. 마치 오래 기다리던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처럼, 조용히, 감사함으로 숨을 거둡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다릅니다. 분노와 억울함, 원망과 두려움 속에서 마지막을 맞습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라는 말이 끝내 입술을 떠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그 차이는 얼마나 열심히 섬겼는가가 아닙니다. 그 차이는 무엇으로 섬겼는가입니다. 성령으로 섬긴 사람은 이미 이 땅에서 수없이 죽음을 연습한 사람입니다. 자기 의가 무너지고, 자기 계획이 좌절되고, 자기 확신이 해체되는 과정을 하나님의 은혜로 통과해 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육으로 섬긴 사람은 끝까지 자기 의를 놓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순간, 그 의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때 그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두렵게 됩니다.
인간의 첫 죄는 ‘벌거벗음’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뒤,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묘하게 말합니다. 그들이 부끄러워진 이유는 벌거벗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원래 벌거벗고 있었습니다. 그 상태로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진짜 죄는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자기 몸을 가리기 시작한 순간 인간은 이렇게 선언한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내 힘으로 부끄러움을 가릴 수 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적인 타락인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되려는 시도, 자기 존재를 스스로 정당화하려는 몸부림 이후 모든 종교적 열심은 이 무화과나무 잎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그들을 즉시 죽이지 않으셨을까요?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즉시 멸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무죄한 짐승을 죽여 그 가죽으로 그들을 덮으십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용서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존재 방식의 선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스스로를 가릴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희생으로 덮임을 입은 자만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나무는 감추어집니다. 은혜로만 접근 가능한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힘으로 다가가면 그 나무는 축복이 아니라 심판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는 것이 과하겠느냐.” 복음은 헌금만 요구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자기 자신 전체의 죽음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파괴가 아닙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끝난 죽음을 확인해 가는 여정입니다. 성도의 삶이 힘든 이유는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살아 있으면서 이미 죽은 자임을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깊은 헌신을 쌓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의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만을 붙드는 삶입니다. 그 자리에서는 자랑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습니다. 다만 고백만 남게 됩니다. “주님, 제가 바로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의 피가 저를 덮으셨습니다.” 이 고백이 있는 자리, 그곳이 바로 신령한 것 안에서, 심령으로 드려지는 참된 섬김의 자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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