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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말씀 묵상

빚진 자들, 두 증인의 죽음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 31.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로마서 1:14~15)

“정당할수록 나는 더 죄인이다.” 유대인 철학자 레비나스의 이 말은, 성령의 책망을 받은 자들에게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자기 진단입니다. 책망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잘못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가치와 영광을 지키기 위해
‘정당함’마저도 도구로 삼습니다. 겉으로 정결하고 순결하며 도덕적으로 흠이 없어 보일수록, 은혜를 모르는 인간은 오히려 자아숭배의 더 깊은 죄 속으로 빠져듭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을 ‘죽은 자들의 세상’이라 명명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을 삶의 주체로 삼아 사는 모든 존재는 죄와 허물로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역사는 살아 있는 척하는 시체들이 가득한 거대한 무덤과 같습니다. 썩은 냄새와 더러운 물, 곧 인간 욕망의 배설물만을 끊임없이 생산해 냅니다. 문제는 이 역사 속에 던져진 수많은 아담의 후손들 가운데 이 실체를 올바로 바라볼 수 있는 자가 단 한 명도 없다는 데 있습니다. 모두가 죄와 허물로 죽은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좀비처럼 사는 것이 정상이고 정당하다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세 전에 아들에게 주기로 약속하신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눈과 귀를 여십니다. 그들은 그동안 인간의 선악 구조 속에서 오해해 왔던 죄와 의와 심판의 실체를 조금씩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 모습은 예수님의 질문에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다닙니다”라고 대답했던 개안된 맹인과 같은 것입니다. 한 번에 세상의 실체를 완전히 꿰뚫어 보지는 못하지만, 점점 초점이 맞춰집니다. 흐릿하던 세계관이 서서히 선명해지고, 그 결과 이 헛되고 어두운 세상으로부터의 탈주를 갈망하게 됩니다. 성경은 그것을 ‘소망’이라 부릅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에는 이런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한 왕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마법사가 백성들이 사용하는 우물에 묘약을 풀어 모두 미치게 만듭니다. 왕과 왕비만은 다른 우물을 사용해 제정신을 유지하지만, 미쳐버린 백성들은 오히려 왕을 미쳤다고 여기고 반란을 일으킵니다. 결국 왕은 백성들과 같은 물을 마시고서야 왕좌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정신병원
‘빌레트’에 갇힌 제드카는 말합니다. “담장 밖의 사람들은 모두 같은 우물물을 마신 사람들이야. 그래서 그들은 서로를 정상이라 부르지.” 그는 차라리 그들과 다른 미친 사람으로 사는 편이 낫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미친 자입니까? 비정상이라 낙인찍힌 소수입니까, 아니면 힘과 성공과 복에 집단적으로 도취된 이 좀비들의 세상입니까?

세상은 자신들이 설정한 선악의 기준으로 정상과 비정상을 가릅니다. 그 기준에 들기 위해 사람들은 인생 전체를 겁니다. 그러나 아담 안에서 태어난 인간 중 이 기제적 삶의 공식에서 자유로운 자는 없습니다.

오직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이 공식을 벗어납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미친 사람처럼, 이 세상의 원리와 반대 방향으로 끌려갑니다. 그것은 그들 안에 능력이 생겨서가 아니라, 밖에서 띠를 띠우고 저항할 수 없는 힘이 그들을 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 떼처럼, 그들의 삶은 사투가 됩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 미친 세상의 실체를 보았기에, 고통 속에서도 소망으로 기뻐하고 평안해힓니다.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묶이는 것을 성경은 ‘
거룩’이라 부릅니다.

바울은 이런 성도의 존재 방식을 한 단어로 요약합니다.
“빚진 자.” 헬라어 ‘옵헤일레테스’는 법정에서 이미 유죄 판결을 받은 채무자를 가리킵니다. 갚지 않으면 감옥에 갈 수밖에 없는 자입니다.

성도가 반드시 내어놓아야 할 채무는 무엇입니까? 바로 복음입니다. 이는 단순히 전도나 선교를 하라는 윤리적 권고가 아닙니다. 복음을 받은 자의 삶 전체가 복음으로 흘러나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라”(고전 9:16) ‘부득불’(아낭케)은 강제와 필연을 뜻합니다. 복음을 살아내지 않는다면, 바울은 자신이 지옥 앞에 선 망자와 같다고 고백합니다. 성도의 삶에서 복음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1장의 두 증인은 교회, 곧 빚진 자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들은 굵은 베옷을 입고 예언합니다. 이는 장례복입니다.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하나입니다.
“너희는 죽은 자들이다.” 이 싸움은 먼저 성도 자신의 내면에서 시작됩니다. 말씀을 먹으면 입에는 꿀같이 달지만, 배에서는 씁니다. 말씀은 옛 자아를 애가와 애곡과 재앙으로 해체합니다.

그 전쟁이 깊어질수록 세상과의 충돌도 심해집니다. 결국 성도는 예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몸으로 증거하다가, 세상으로부터 미친 사람 취급을 받게 됩니다. 그
러나 바로 그 고립과 소외 속에서만 참된 생명이 드러납니다.

빚진 자, 두 증인의 삶은 이 역사에 희망을 주는 삶이 아니라 이 역사에 초를 치는 삶입니다. 인간의 가능성과 주체성을 무너뜨리고, 오직 은혜만을 붙들게 만드는 삶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웃음보다 눈물이 많고, 확신보다 탄식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는 성령으로 세워집니다. 힘으로도, 능으로도 아니요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게 됩니다. 그 길을 걷는 자가 빚진 자요, 두 증인이며, 끝내 살아나는 자인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더 이상 이 세상을 예전처럼 볼 수 없습니다. 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결국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정상으로 인정받기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라, 미친 사람 취급을 받으며 증언하도록 보내진 존재입니다. 성령을 받은 자는 더 이상 이 세상의 우물물을 마실 수 없습니다. 이미 다른 물을 마셨기 때문입니다. 그 물은 처음에는 꿀처럼 달지만, 삶 속으로 흘러 나올 때는 쓰디쓴 애가와 애곡과 재앙이 됩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편안해질 수 없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세상에 잘 적응하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이 세상에 살 수 없게 만듭니다.

성령은 우리를 강제로 끌고 가십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부득불입니다. 그러나 그 강제 속에는 은혜가 있습니다. 이 역사와 이 육신이 영원한 집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갈수록, 하나님 나라는 점점 더 선명해집니다.

두 증인은 결국 죽임을 당합니다. 세상은 그들의 죽음을 기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살리십니다. 성도의 삶도 그렇습니다. 날마다 죽임을 당하지만, 그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그 죽음은 증인의 완성이며, 빚진 자의 채무 상환입니다.

복음을 받은 자는 반드시 복음을 살게 됩니다. 살지 않으면 화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복음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빚진 자의 삶이며, 이것이 두 증인의 길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