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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말씀 묵상

원칙대로 하셨다면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 31.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1:16~17)

우리는 흔히
‘원칙’을 정의와 동일시합니다. 원칙을 지키는 사람을 바른 사람이라 부르고, 원칙에서 벗어나는 선택을 약함이나 타협으로 여깁니다. 세상은 냉정하지만 일관된 판단을 신뢰합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든 “원칙대로 하자”는 말은 늘 정당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이 원칙이라는 단어를 하나님 앞에 그대로 가져다 놓는 순간, 우리는 불편해지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정말 원칙대로만 우리를 다루신다면, 우리는 단 한 사람도 그 앞에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예능 프로그램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규칙을 어긴 참가자는 탈락해야 했습니다.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작진 중 한 사람이 그 참가자를 불쌍히 여겨 대신 책임을 지겠다고 나섰고, 결국 그 사람은 프로그램에서 퇴출당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규칙을 어긴 사람은 살아남았고, 긍휼을 베푼 사람은 탈락했습니다. 시청자들은 분노했습니다.
“원칙을 어겼다”, “공정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이 반응은 지극히 인간적입니다. 우리는 원칙이 무너지는 것을 정의의 붕괴로 느낍니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도 원칙을 지키는 분이신가?”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분명히 원칙을 세우신 분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명확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이것은 협상이 아니라 선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질서였고, 그 질서를 벗어나는 것은 곧 죽음이었습니다.

문제는 인간입니다. 아담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말씀을 완벽히 지킬 수 있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조금 더 도덕적인 사람은 있을 수 있고, 조금 더 종교적인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완전한 순종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원칙대로라면 결론은 하나뿐입니다. 모두가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류는 여전히 존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반드시 질문해야 합니다.
“왜 우리는 아직 살아 있는가?” 이 질문의 답이 바로 복음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원칙을 폐기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원칙을 누구보다 철저하게 지키셨다고 말합니다. 다만 그 원칙의 결과를 인간에게 적용하지 않으시고,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셨습니다.

이것이 창세전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살리기 위해 원칙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원칙을 자기 몸에 짊어지셨습니다. 죽어야 할 자를 살리기 위해, 죽지 않아도 되는 분이 죽음을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우리는 흔히
‘의’를 도덕적 우수성이나 착함으로 이해합니다. 남보다 더 선하게 살면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인간의 착함은 상대적인 비교일 뿐, 하나님의 기준 앞에서는 의가 될 수 없습니다.

의는 인간에게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자기 보존이 아니라 자기 희생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자기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셨고, 인간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낮아지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의가 역사 속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장면이 바로 예수님의 세례입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는 죄인들이 받는 세례였습니다. 회개한 자들이 물속으로 들어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죄 없으신 예수님이 그 자리에 서셨습니다. 요한은 말립니다.
“제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예수님은 죄인의 자리에 서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습니다. 의는 죄인과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니라, 죄인과 연합하는 방식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이 의는 십자가에서 완전히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가장 의로우신 분이었지만, 가장 부당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의인은 대개 추앙을 받지만, 하나님의 의는 언제나 배척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자존심을 철저히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참된 의인은 늘 죽임을 당합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그 결과 형제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히브리서가 말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대부분 평안한 삶이 아니라 고난의 길을 걸었습니다. 여기서
‘증인’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성경에서 증인은 곧 순교자를 의미합니다. 의의 증거는 성공이 아니라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증거의 흐름을 완성하신 분입니다. 모든 선지자의 증언이 예수님에게로 모였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의는 단번에 완성되었습니다. 더 이상 인간이 보탤 의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삶은 무엇입니까? 더 착해지는 삶입니까? 더 성공하는 삶입니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도의 삶은 이미 완성된 의에 붙들려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로마서 1장 1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여기서 주어는 인간이 아니라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사람을 끌고 가는 것입니다.

결국 성도의 인생은 잘 사는 인생이 아니라, 매일 죽으며 증인으로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원칙대로 우리를 대하셨다면 우리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원칙을 자기 몸에 적용하셨고, 우리는 그 은혜로 살아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의를 세울 수 없고, 오직 감사와 경외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