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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말씀 묵상

당신은 정말 괜찮은 사람입니까?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2. 13.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 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로마서 1:18~25)

최영미 시인의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386세대의 아이콘이었던 그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80년대 학생운동의 선봉에 섰던 사람이, 최루탄 연기 속에서 투쟁가를 부르며 민주화를 외쳤던 그가, 사실은 운동 자체보다 운동가라는 정체성을, 투쟁보다는 그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고 털어놓은 것입니다.

평론가들은 이 시집이 80년대를 통째로 박제화했다고 평했지만, 저는 그들이 놓친 것이 있다고 봅니다. 최영미는 80년대를 박제화하기에 앞서, 자기 자신을 먼저 박제화했습니다. 투사로서, 정의의 사도로서 부풀려졌던 자아상을 스스로 해체한 것입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이 그토록 열심히 싸워온 모든 것, 자신의 정체성 그 자체를 의심하고 부정하는 일이니까요. 그러나 그는 용기 있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냅니다.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도 결국 이 자리로 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율법에 있어서는 흠이 없고,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며, 의로는 율법의 의에 흠이 없었던(빌 3:6) 그가 결국 어떤 고백에 이르렀습니까?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이것이 진짜 신앙인의 커밍아웃입니다. 엄청난 헌신과 열심으로 자신의 실체를 감추어 오던 사람이, 마침내 자신의 민낯을 직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백성들에게서 이러한 올바른 자아 진단을 끌어내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인지, 우리 안에 어떤 악이 도사리고 있는지를 똑바로 보게 하십니다.

로마서 1장 18절부터 시작되는 본문을 많은 사람들이 오해합니다. "이 구절은 불신자들을 향한 경고야. 우상 숭배하고 온갖 죄악을 저지르는 저 사람들 얘기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안도합니다. '난 그렇지 않아서 다행이야.'

정말 그럴까요? 바울이 나열하는 죄의 목록을 다시 보십시오. 정말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까?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으며, 자기 생각이 옳다고 믿고 사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로마서는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불신자를 향한 협박장이 아니라, 교회를 향한 복음 서신입니다. 바울은 지금 교회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를 꺼내어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의가 필요한 거야"라고 말하기 위해
서입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롬 1:19) 이 구절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알만한 것을 누구에게 보이십니까? 당신이 택한 백성에게만 보이십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눅 8:10) 계시는 하늘의 백성들에게만 주어집니다. 자연과 만물에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나타나 있지만, 그것을 감지할 수 있는 이는 성도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 14:9).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하나님을 알게 된 사람들, 예수를 만난 사람들조차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 이 말씀이 정말 우리와 무관합니까? 솔직히 물어봅시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게 감사하십니까?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여전히 자기 자신이 삶의 주인공이고, 하나님은 그 삶을 도와주시는 조연 정도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사람들은 구원을 얻은 이후에도 자기를 만물의 척도로
삼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왜곡되어 인식됩니다. 만물의 척도는 하나님이신데, 자기 자신을 그 자리에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심지어 신앙생활도 그렇게 합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결국은 자기 욕망을 투사해서 만든 엉뚱한 신을 믿습니다. 나를 축복해주고, 내 기도를 들어주고, 내 뜻대로 움직여주는 신 말입니다. 그것이 우상입니다. 우상 숭배는 나무나 돌로 만든 신상을 섬기는 것만이 아닙니다. 신을 믿기는 믿는데, 자기 욕망의 투사로 조작한 신을 믿는 것이 진짜 우상 숭배입니
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3) 하나님의 영광은 변하지 않고 썩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일, 십자가를 통해 완성된 구원은 완전하고 완료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이 불완전하다고 생각합니다. 부족하고 변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자꾸 인간의 행위로 무언가를 보태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해주신 것만으로는 부족해. 내가 뭔가 더 해야 해.' '나도 열심히 헌신하고, 봉사하고, 기도해야 구원받을 수 있어.'

이것이 율법주의요, 인본주의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것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완전한 것을 불완전한 것으로, 완료된 것을 미완성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롬 1:24)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오해합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포기하고 방치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원문을 보면 전혀 다릅니다. '내어 버려 두사'로 번역된 단어는 '파라디도미'인데, 이것은 '방치'가 아니라 '넘겨주다'는 뜻입니다. 적극적인 의지를 담은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더러움에 넘겨주셨
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됐습니까?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원문에는 '서로'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들이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일부러 악한 상황 속에 넣으셨다는 것입니다. 왜요? 그들이 자신의 실체를 똑바로 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구약에서도 반복되는 패턴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사람들을 다 쫓아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동시에 가나안 사람들을 다 쫓아내지 않으시겠다고도 하셨습니다. 그들을 남겨두셔서 이스라엘의 가시와 올무가 되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이스라엘
이 고통받게 하려고?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부르짖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저 사람들과는 도저히 함께 살 수 없습니다. 우리를 도와주세요!' 이 부르짖음이 나오게 하시려고 그들을 고난 속에 넣으신 것입니다. 사사기 전체가 이 패턴의 반복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방 민족에게 넘겨주시고, 이스라엘이 부르짖고, 하나님이 사사를 보내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인본주의자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부끄러운 존재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되어버린 인간들은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합니다. '나는 선한 사람이야. 나는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낫지.'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모종의 조치를 취하심으로 그들이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인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자신이 기특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사실은 쓰레기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의롭다고 여
겼던 모든 행위가 사실은 하나님 없이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악에게 넘겨주시는 이 '파라디도미'라는 단어가 또 어디에 쓰였는지 아십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악에게 넘겨주신 분이 바로 당신의 아들 예수님입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예수님을 망하게 하려고?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긍휼을 만천하에 알리시기 위해서입니다. 죽음에서 살려내시기 위해, 악에게 넘겨주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악에게 잠시 넘겨주시는 것은, 그들을 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 안의 교만과 인본주의를 죽이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로 살려내시기 위함입니다.

이 진리를 깨달은 사도 바울은 갑자기 찬송을 터뜨립니다.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롬 1:25) 로마서 11장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2)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 가운데 가두셨다고 합니다. 왜요?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꼭 그런 방법을 쓰셔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그리고 다시 찬송합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여기서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겉으로 드러나는 죄를 얼마나 많이 짓는가, 혹은 얼마나 줄여내는가에 일차적 관심이 있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 스스로 그러한 죄를 줄여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거기에 진노하십니다. 그것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섬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은 본질적으로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입니다.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존하지 못하면 존재할 수조차 없는 것이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의 가능성과 능력에 근거해서 뭔가 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마치 부족한 것처럼, 변개할 수 있는 것처럼 만듭니다. 이것이 피조물의 자리 이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이 역사 속으로 내몰아 더러움에 넘겨주십니다.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당신의 백성들이 자신들의 실체를 올바로 자각하게 됩니다. '나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존재구나.
나는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나는 정말 부끄러운 존재구나.'

그리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의만을 오롯하게 붙드는 자로 변화됩니다. 이 과정이 고통스럽지 않습니까?
물론입니다. 자신이 믿어왔던 모든 것, 자랑스러워했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경험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자신이 불순종에 갇혀 있는 무력한 죽은 흙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하나님의 의만이 나의 살 길임을 알게 된 자에게서 진짜 순종이 나옵니다. 성도는 불순종의 삶이 얼마나 부끄러운지를 처절하게 경험합니다. 동시에 자신의 힘으로는 그 자리에서 단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도 깨닫습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 그분의 도우심과 긍휼과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순종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끝까지 자기 힘으로 뭔가 해보려고 합니다. 언뜻 보면 기특한 것 같지만, 그들은 절대로 자신의 죄를, 불순종의 상태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릅니다. 자신의 불순종이 얼마나 더럽고 부끄러운 상태인지를 절절하게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점점 더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물으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살라는 겁니까? 구체적으로 뭘 하라는 건가요?" 그런데 이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성도의 삶은 누군가의 권면이나 지침으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말씀이 살아서 운동력이 있는데, 왜 우리가 말씀을 죽은 것으로 만듭니까? 말씀 자체가 우리 안에서 일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쪼개고 분별해냅니다. 칼빈도 이렇게 외쳤습니다. "설교자들아, 말씀이 일을 하게 하라!"

하나님은 반드시 이 역사와 인생 속에서 성도의 커밍아웃을 받아내십니다. 최영미 시인이 "나는 운동보다 운동가를 더 좋아했다"고 고백했듯이, 우리도 결국 "나는 하나님보다 나를 더 사랑했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라고 고백했듯이, 우리도 결국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인지를 깨닫는 것,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의만을 붙들게 되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아직도 '내가 뭐 그렇게 큰 죄인인가?' 하는 생각이 드십니까? '나는 그래도 열심히 믿고 있는데'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렇다면 아직 하나님의 은혜가 충분히 임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실체를 당신의 눈에 밝히 보이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때 당신은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뭔가 해야 한다는 조급함에서, 남들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갈망에서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단 하나, 그분만 붙드는 것입니다.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