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로마서 1:26~32)
공자는 일흔 살에 마침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따라 해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는 경지인, "종심"에 도달했다고 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고 예를 실천하며 살아온 끝에 그의 마음은 마침내 하늘의 도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그 높이에 오른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그는 분명 위대했습니다.
그런데 그 공자가 죽었습니다. 종심에 이른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평생 꿈꾸던 이상 세계, 도가 행해지는 그 나라는 끝내 이 역사 속에 구현되지 않았습니다. 죽음에 대해 묻는 제자에게 그는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사는 것도 잘 모르는데 죽음을 어떻게 알겠느냐." 죽음 너머를 알 수 없었기에 그가 추구할 수 있는 것은 죽음 이전의 세계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종심의 자리에서 그는 무덤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늘 이 이야기는 공자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위대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위대하면 위대할수록, 그의 결말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더 무겁고 더 날카로워집니다. 인간의 열심이 가닿을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오른 사람도 결국 무덤으로 들어갔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열심인가, 아니면 전혀 다른 무언가일까?
로마서 1장 후반부를 처음 읽는 사람은 대개 불편함을 느낍니다. 동성애, 불의, 탐욕, 시기, 살인, 사기, 교만, 무자비… 스무 개가 넘는 죄의 목록이 줄지어 나옵니다. 그리고 32절에서는 이것들이 사형에 해당한다고 못 박습니다.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각 항목을 자신에게 대입하게 됩니다. '이건 나와 무관하고, 저건 좀 걸리고, 이건 절대 아니야.' 그렇게 항목을 분류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가늠해 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이 목록을 쓴 이유는 그 분류 작업을 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비유를 하나 들어보면, 어느 의사가 환자를 진찰한 후 차트에 증상 목록을 빼곡히 적었습니다.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간수치 이상, 신장 기능 저하… 환자는 그 목록을 들여다보며 생각합니다. '고혈압은 맞고, 당뇨는 약하게 있고, 신장은 아직 괜찮은 것 같고.' 그런데 의사가 말하는 것은 그게 아닙니다. 의사가 말하려는 것은 하나입니다. "당신 지금 많이 아픕니다. 치료받으셔야 합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지금 인간의 상태를 진단하고 있는 것이지, 죄의 경중을 서열화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증상들의 뿌리는 하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뿌리에서 나온 것들은, 그 뿌리를 뽑지 않는 한, 우리 모두에게서 언제든 자라날 수 있습니다.
28절에서 바울은 날카로운 표현을 씁니다. "상실한 마음"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도키몬 눈'은 직역하면 '신에게 버림받은 지성'입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는 것은 결국 내가 스스로 신이 되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그 선언 자체가 이미 버림받은 상태라는 역설이 여기에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 어딘가에서 이 선언을 해왔습니다. 명시적으로 "나는 신이다"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내 판단이 옳고 내 기준이 맞으며 내 유익이 최우선이라고 살아온 순간들, 그것이 다 그 선언의 연장선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사람은 자기를 지키기 위해 가면을 만들어 냅니다. 진짜 자기 얼굴은 너무 추악하기 때문에, 도덕과 윤리와 착한 행위라는 가면을 쓰고 세상 앞에 섭니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가면을 자기 자신으로 착각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가면이 두꺼울수록 내면의 진짜 얼굴은 더 깊은 곳에 잠겨 스스로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 가면의 이중성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 있습니다. 타인에게서 자기 안의 욕망과 똑같은 것을 발견했을 때입니다. 심리학에서 투사라고 부르는 현상입니다. 자기 안에 감추어 둔 것이 다른 사람에게서 보이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공격합니다. 그 공격으로 자기 안에는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의 장면이 떠오릅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돌로 치려던 무리들이 있습니다. 왜 그들의 분노가 그토록 격렬했을까요? 자기들도 하고 싶어 죽겠던 것을 누군가 해내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돌로 쳐 죽여야 자기 안의 욕망이 감추어집니다. 예수께서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을 때, 그들이 하나씩 자리를 떴습니다. 예수의 말이 그들의 가면을 꿰뚫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이 가면을 더 두껍게 만드는 곳인가, 아니면 벗기는 곳인가? 안타깝게도 많은 경우 교회는 가면에 덧칠을 해주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도덕적으로 살라, 착하게 살라, 봉사하라, 헌신하라, 그 모든 권면들이 결국 '더 두꺼운 가면을 쓰라'는 말이 될 때, 교회는 공자의 학당과 다를 바 없어집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니까 더 위험합니다.
기독교는 죄를 안 짓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것은 유교이고, 불교이고, 이슬람입니다. 기독교가 향하는 목적지는 다릅니다. 인간의 실체를 올바로 직시하게 하여, 그 죄에 올바로 반응하게 하는 것. 즉, 하나님을 향한 절박한 부르짖음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인간의 도덕성에는 구조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진짜 마음을 빼앗길 만한 것을 만나기 전까지만 자신을 도덕으로 붙들어 맬 수 있습니다. 어지간한 유혹 앞에서는 의지가 작동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강렬한 것 앞에서는 그 의지가 종잇장처럼 구겨집니다. 사람들이 도덕적이라고 평가받는 대부분의 경우는, 그들이 진짜 원하는 것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을 때의 심드렁함일 수 있습니다.
공자도 그것을 알았기에 그토록 치열하게 자기 수양에 매달린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공자도 종심에 이른 후 무덤으로 들어갔습니다.
필립 얀시의 절친한 친구 멜 화이트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목사였고, 베스트셀러 작가였으며, 결혼하여 아이들까지 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커밍아웃을 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 정체성의 혼란으로 수차례 자살을 시도했고, 수년간 정신과 치료를 받았으며, 충동이 일 때마다 전기 충격을 가하는 혐오요법으로 자기 몸을 괴롭혔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싸웠는데도 안 됐다고 했습니다.
그 일로 그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직장도, 가정도, 그동안 쌓아온 명성도, 그의 책은 반품되기 시작했습니다. 한 방송국 기자가 그의 어머니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아들이 지금 이런 취급을 받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괴물 취급을 받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사랑스러운 아들이요, 어미의 자랑이요, 내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자식입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자기 자식이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순간에도 어머니의 눈에는 그저 사랑스러운 아이로 보이는 것입니다. 육신의 어머니도 이러한데, 창세전에 이미 아들로 삼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를 버리시겠습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물어야 합니다. 멜 화이트가 자신의 죄와 싸우기 위해 그 정도의 싸움을 했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서 나오는 죄와 싸우기 위해 그 정도의 열심을 부린 적이 있습니까? 전기 충격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절반만큼이라도 말입니다. 그렇게 싸웠는데도 안 되는 것이 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죄를 자백하라고 강조한 직후, 변호사 한 분을 소개합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변호사는 의뢰인의 죄 없음을 증명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변호사는 보통 변호사가 아닙니다. 그는 의뢰인의 무죄를 주장하기 위해 자기가 직접 그 죄를 전부 뒤집어씁니다. 화목제물이 된다는 말이 그것입니다. 의뢰인에게 남은 일은 하나뿐입니다. "나는 죄인이고, 내게는 그 죄를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변호사님, 저를 무죄로 만들어 주십시오." 이 고백 하나입니다.
이사야 53장은 그 변호사의 수고를 이렇게 전합니다.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그분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전히 죄를 지으면서도 구원을 찬송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열심이 아니라 그분의 기도 덕분입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의 죄 목록들 앞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가자'는 결단입니까, 아니면 '이것들이 다 나에게서 나올 수 있구나'라는 인정입니까. 32절은 이렇게 끝납니다.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 있는 자들에게서 그 행사들이 나옵니다. 마치 자기만은 거기에서 제외된 것처럼 다른 이들을 정죄하는 자들, 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다 넘겨졌습니다.
그 중에서 "저도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라며 자신의 실체를 시인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저 사형당해 마땅한 자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가 성도입니다. 겉과 속이 같아지는 사람들은 다름아닌 창녀와 세리들이 그러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달랐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다릅니다"라는 가면이 너무 두꺼웠습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아니하면 절대로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낫다'는 것은 조금 더 도덕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종류의 의가 아닌, 다른 종류의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 행위를 근거로 한 의가 아닌, 예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의, 그 의를 붙든 세리와 창기들이 하나님 나라로 들어간 것입니다.
영원 속에서 죽지 않으려면, 이 역사 속에서 먼저 죽어야 합니다. 자기만을 사랑하고 자기를 신 삼아 살던 자들이 그 실체를 직면하고 무너지는 것, 그 무너짐 위로 하나님의 은혜가 덮치는 것, 그 죽음이 예수의 은혜를 붙들게 만듭니다. 성도는 약관, 이립, 불혹, 지천명, 이순을 거쳐 종심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이 안 되는 자신을 직시하고 인정하며 예수의 피를 의지하는 것, 그것이 성도의 일차적 목적지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계발하고 노력하여 종심에 이르고 자신의 영광을 챙기려 합니다. 성도는 그 반대 방향으로 걸어갑니다. "내가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라고 고백하며 낮아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의 인생을 무덤이라 부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로 우리를 보십니다.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을 감동시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전에 "너는 내 백성이야"라고 이름을 주신 자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라고 고백하며 하나님 나라로 들어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보시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가 있는지를 보십니다. 공자는 종심의 자리에서 무덤으로 들어갔습니다. 성도는 무덤의 자리에서 부활로 나아갑니다. 그 차이는 우리의 열심의 크기가 아니라, 우리가 붙드는 손이 무엇이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말씀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당신은 정말 괜찮은 사람입니까? (0) | 2026.02.13 |
|---|---|
| 진노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죄인들 (1) | 2026.02.06 |
| 원칙대로 하셨다면 (0) | 2026.01.31 |
|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0) | 2026.01.31 |
| 빚진 자들, 두 증인의 죽음 (0) | 2026.0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