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로마서 1:26~32)
어느 미술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여성이 전시장 한가운데 멈춰 서서 그림 하나를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그림은 특별히 화려하지도, 기술적으로 탁월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한참 후 그녀가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이 사람은 뭘 말하고 싶었던 걸까." 그 한마디가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습니다.
그림 앞에 선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하는 질문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깊이가 뭔지도 모르면서, 깊이를 찾으려 합니다.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면서, 의미를 캐내려 합니다. 그리고 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면 자신이 무언가 부족한 사람인 것처럼 느낍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깊이에의 강요」는 바로 그 인간의 모습을 정면으로 응시합니다. 한 여성 예술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평론가가 그녀의 작품을 두고 무심히 한마디를 던졌습니다. "깊이가 없군요." 그 한마디가 그녀를 천천히 무너뜨렸습니다. 그녀는 밤마다 고뇌했고,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 이후, 같은 평론가가 그녀의 작품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보이는군요. 삶을 파헤치려는 열정, 깊이에의 강요가." 그녀가 살아있을 때는 없다고 했던 깊이가, 그녀가 죽고 나자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이 아이러니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의 민낯입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깊이를 강요받으며 삽니다. 그리고 동시에 누군가에게 깊이를 강요하며 삽니다. '엄친아', '엄친딸'이라는 말을 떠올려 보십시오. 엄마 친구의 아들, 엄마 친구의 딸. 그들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유령 같은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 유령은 우리 어린 시절 식탁 위에 매일 등장했습니다. "걔는 서울대 갔다더라. 걔는 의사 됐다더라. 너는 왜 그러니."
그 말을 듣고 자란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 이번에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같은 말을 합니다. 깊이가 무엇인지, 성공이 무엇인지, 그 목적지가 왜 좋은 것인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서도, 그 방향으로 달려야 한다고 몰아붙입니다.
아프리카 초원의 스프링복이라는 동물이 있습니다. 이 동물은 때로 수천 마리가 한 방향으로 달리다 벼랑 끝에서 그대로 떨어져 죽습니다. 앞서가는 개체들이 이미 낭떠러지인 것을 알면서도 뒤에서 밀려오는 무리의 압력에 멈출 수 없어 뛰어내리고, 뒤따르는 것들은 앞이 낭떠러지인지도 모른 채 달립니다. 군중 돌진이라 불리는 이 현상은, 어쩌면 인간 사회의 정직한 은유입니다. 왜 달리는지 모르면서, 멈추면 뒤처질까 봐, 죽을 때까지 그냥 달립니다.
나탈리 포트만이 주연한 영화 「블랙 스완」의 발레리나도 그렇게 달렸습니다. 완벽한 백조가 되기 위해, 누군가의 인정을 받기 위해, 자신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달리다 끝내 죽음으로 자신의 깊이를 증명했습니다. 죽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번진 것은 황홀함이었습니다. "완벽했어." 그것이 그 세계의 문법입니다. 살아서 인정받지 못하면, 죽어서라도 박수를 받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인간에게 새겨진 본성입니다.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망, 자신의 존재성과 가치와 깊이를 스스로 증명하고 싶어 하는 충동, 그 충동이 너무나 강렬하여 죽음조차 그것을 막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세계를 향해 전혀 다른 방향의 힘이 침투해 들어옵니다. 복음입니다. 복음을 처음 만났을 때의 당혹감을 기억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열심히 쌓아온 것들이 갑자기 흔들렸던 경험, 내가 추구하던 것들이 갑자기 낯설어진 순간, 그것은 단순한 감정의 변화가 아닙니다. 방향이 바뀌는 것입니다. 온 삶이 동쪽 고지를 향해 달리고 있었는데, 복음은 서쪽 골짜기를 가리킵니다. 올라가라는 세상의 명령에 반하여, 복음은 내려가라고 말합니다. 증명하라는 세상의 요구에 반하여, 복음은 내려놓으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만난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전부 손잡고 달려가는 방향인데, 혼자 딴 길을 가는 사람, 성공을 향해 달려야 할 나이에 무언가를 버리기 시작하는 사람, 주변에서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 안에서는, 오히려 뭔가 살아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먼저 인간 존재의 목적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골프채는 골프공을 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타이거 우즈의 손에 들려 페어웨이를 가로질러 날아가는 공을 만들어낼 때, 그 골프채는 제 가치를 발휘합니다. 그런데 누군가 그 골프채를 가지고 패싸움을 했다고 합시다. 기능은 했을 것입니다. 무기로서 충분히 쓸 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골프채의 가치가 발휘된 것이 아닙니다. 목적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인간도 그렇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지어졌습니다. "내가 내 영광을 위해 창조한 내 백성을 오게 하라"는 말씀이 그것을 정확히 밝혀줍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순서입니다. 인간을 위해 하나님의 계획이 세워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그려내기 위해 인간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은 인본주의적 감각으로는 불쾌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바로 이 사실 안에 인간의 진정한 존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도록 지어진 인간이,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산다면 어떻게 됩니까? 성경은 그것을 '죽음'이라고 부릅니다. 움직이고, 숨 쉬고, 말하고, 생각하지만, 죽은 것입니다. 바울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언한 것은, 의인만이 산 자인데 의인이 없다는 말, 곧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죽어있다는 선언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살아있는 사람을 더 좋은 상태로 업그레이드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어있는 것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입니다. 창세기가 인간을 흙으로 지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인간의 재질이 흙이라는 화학적 설명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 무(無)였던 것이 어떻게 유(有)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오기 전의 먼지는, 먼지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입김을 불어넣으실 때 비로소 살아있는 존재가 됩니다. 그것이 창조입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왜 하나님은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유기하십니까"라는 질문은, 이 지점에서 전제 자체가 잘못된 것임이 드러납니다. 그 질문은 모든 인간이 살아있는데 하나님이 일부를 죽음으로 밀어 넣는다는 가정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반대입니다. 모두가 죽어있는데, 하나님이 그중 얼마를 들어 올려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박해가 아니라 은혜입니다. 유기가 형벌이 아니라, 구원이 선물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창세전에 이미 선택되고, 묵시 속에 이미 완성되어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 내려왔을 때, 처음에는 죽은 자들과 똑같이 삽니다. 다윗도 바울도 "나는 죄 중에 잉태되었고 모태에서도 죄인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로마서 1장의 표현으로는, 정욕에 버려두심, 즉 죽음의 영역에 넘겨진 것입니다.
왜입니까?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죽음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죽은 자들의 세상이 어떤 곳인지, 몸으로 경험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이 얼마나 공허한지, 자기 영광을 위해 사는 삶이 얼마나 고단한지를, 직접 살아보며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뭔가 다른 일이 일어납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같은 방향으로 달려가는데, 산 자로 지어진 사람은 그 방향이 이상하게 편치 않습니다. 죄에 대한 자각이 시작됩니다. 이 세상이 주는 것들이 자꾸 공허하게 느껴집니다. 갖고 싶었던 것을 가졌는데 채워지지 않고, 오르고 싶었던 자리에 올랐는데 불안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철장이 개입하여, 자기 존재성과 주체성을 챙기기 위한 모든 시도들을 하나씩 부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을 성도의 무덤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 무덤은 잔인한 형벌이 아닙니다. 영원한 무덤에서 건져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에스겔을 통해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리라."
이 모든 것이 이스라엘의 절기 안에 이미 그려져 있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말합니다.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절기는 장식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그리고 그 예수 안에 있는 성도의 인생을 미리 그려놓은 설계도입니다.
하나님이 유월절을 제정하시면서 하신 일이 있습니다. 달력을 바꾸신 것입니다.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라." 유월절이 있는 그 달부터 1월입니다. 새로운 역사가 열리는 것입니다. 유월절 제물은 흠 없는 초태생이어야 했고, 반드시 생축이어야 했습니다. 왜 사자나 호랑이가 아닌 가축입니까. 생축은 이스라엘의 식량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백성들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주신 것을 다시 받으십니다. 그것은 묻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준 것임을 아느냐." 모든 것이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아는 사람만이 그것을 흔쾌히 내어놓을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 그 생명의 양식이 떡이 됩니다. 그리고 그 떡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에베소서 5장 2절이 그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유월절 어린양은 처음부터 예수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실제로 유월절에 죽으셨습니다. 유월절 저녁 만찬 후 잡히셨고, 오후 세 시, 히브리어로 '에레브 벤', 두 저녁 사이에 운명하셨습니다. 구약의 절기는 이렇게 정밀하게, 수백 년 전부터 메시아의 죽음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유월절이 성도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고린도후서 5장 15절이 답합니다. 예수가 죽으신 것은, 산 자들로 하여금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게 하려 함입니다.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죽음이고, 예수를 위해 사는 것이 삶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유월절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이 죽은 그날부터 7일간, 무교절이 시작됩니다. 히브리어로 '하크 함 마짜트', "장사 지낸 것을 기념하는 축제일"입니다. 이 절기에 이스라엘은 누룩 없는 떡, 무교병을 사흘 동안 땅에 묻었다가 꺼내 먹었습니다. 죽음과 무덤과 부활이, 음식 하나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16장 3절은 그 무교병을 "고난의 떡"이라 부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급히 나오느라 발효도 시키지 못한 채 짊어지고 떠난 떡입니다. "나도 거기서 죽었어야 했는데, 은혜로 살아났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는 떡입니다. 이 무교절 안에 홍해 사건이 들어 있습니다. 유월절부터 일주일이 무교절이고, 그 안에 홍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홍해에서 죽은 것은 단순히 애굽 군대가 아닙니다. 바울은 그것을 이스라엘의 집단적 세례라고 부릅니다. 골로새서 2장 12절입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홍해는 이스라엘 안에 붙어 있던 애굽의 수치, 즉 죽은 자의 방식으로 살아온 흔적들이 씻겨나간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지름길을 두고 굳이 홍해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이유가 출애굽기 13장 17~18절에 있습니다. 전쟁을 보면 애굽으로 돌아갈까 봐. 즉, 죽어 있던 삶으로 되돌아갈까 봐, 먼저 그 삶을 통째로 무덤에 장사 지내게 하신 것입니다.
성도의 인생이 바로 이것입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찾아오는 것은 평탄한 고속도로가 아닙니다. 홍해입니다. 무덤입니다. 누룩 없는 맛없는 떡입니다. 그런데 그 무교절이 고난의 떡으로 기억된다는 것은, 동시에 구원을 기억하게 하는 떡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고난과 감사가 같은 떡 안에 있습니다.
누룩은 성경에서 언제나 죄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끼고, 자신의 무언가를 보태려는 모든 시도가 누룩입니다. 인본주의도, 성공주의도, 물질주의도, 내가 쌓아온 도덕적 자부심도 다 누룩입니다. 바벨탑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돌과 진흙 대신, 인간 스스로 만든 벽돌과 역청으로 더 높이 올라가려는 것입니다.
누룩이 없는 분은 오직 한 분입니다.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단 한 방울도 섞지 않으셨던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사흘 동안 땅에 묻히심으로, 우리 안의 누룩이 사라집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 6:51). 사흘 동안 땅에 묻혔다가 꺼내져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그 떡이 예수입니다.
요한계시록 11장은 두 증인, 곧 교회가 예수님의 십자가가 선 그곳에서 죽임을 당하여 사흘 반을 무덤으로 산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흘 반 후, 하나님으로부터 생기가 들어가 그들이 일어섭니다. 무교절이 교회의 역사 안에서 그대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사흘째 되는 날,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날이 초실절, 첫 열매의 날입니다. 레위기는 그날이 "안식 후 첫날"임을 명시합니다. 첫 이삭 한 단을 흔들어 드리는 절기. '흔들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누프'는 잠자는 것을 깨운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무덤 속에 잠들어 있던 분이 깨어나 하나님 나라로 들어올려지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이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레위기의 초실절이 신약에서 그대로 성취됩니다. 그런데 한 단입니다. 한 이삭이 아닙니다. 단은 여럿을 묶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무덤에 잠들어 있던 성도들이 함께 일어난 것(마 27:52~53)은 이 한 단의 예표였습니다. 첫 열매와 묶인 교회 전체가 함께 들려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이 역사 속에서의 초실절은 아직 새 몸을 입기 전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믿음으로만 누리는 것입니다. 소망입니다. 무덤 같은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에게, 초실절은 무덤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씨앗입니다.
초실절로부터 50일째, 오순절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정확히 50일째 도착한 곳이 시내산이었고, 거기서 하나님이 강림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금송아지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이 섬기고 싶었던 신은, 자신들의 풍요와 안전을 보장해주는 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 오해의 값으로 3,000명이 도륙당했습니다.
신약에서도 같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 왕국을 회복해줄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자신들의 율법 지킴이 그 기반이라고 믿었습니다. 구조가 같습니다. 하나님을 자기 욕망의 도구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같은 결과가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유월절 죽음 후 정확히 50일째 오순절 날, 하나님은 시내산에서와 똑같이 바람과 불로 강림하셨습니다(행 2:1~4). 그리고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성령의 혀(글롯사)가 교회에 임했습니다. 교회가 예수를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열다섯 나라 이상에서 온 사람들이 그 말을 알아들었습니다. 바벨탑 이후 흩어졌던 언어가 하나로 모인 것입니다.
바벨탑의 저주가 해소된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3,000명이 죽었던 자리에서, 오순절에 3,000명이 살아납니다(행 2:41). 이것이 예수의 십자가가 가져온 새 시대입니다. 바벨탑의 문법으로 살던 자들이, 새로운 언어로, 새로운 방향으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선포한 세례는 이것입니다. "예수께서 나 대신 십자가에서 쪼개지셨다." 그것을 믿는다는 고백은 곧 "나의 모든 행위와 사유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자기 부인입니다. 그 자기 부인이 성도의 무덤입니다. 내가 거기 묻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절기가 그려주는 성도의 인생을 한 줄로 요약하면 이것입니다. "무덤에서 산다." 우리는 죄의 목록을 하나하나 극복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1장에 나열된 그 끔찍한 죄의 세목들을 전부 제거해야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이 한마디,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기뻐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내가 죽어야 합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가 맞다"는 자리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바울이 "나는 매일 죽노라"고 했을 때, 그것은 탄식이면서 동시에 찬양이었습니다. 매일 죽는 것은 매일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덤에 묻히는 것이 무덤에서 나오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이 세상에서 무덤의 현실을 제대로 경험한 사람만이, 이스라엘의 가을 절기를 살 수 있습니다.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 7월 1일, 10일, 15일. 7은 안식의 수입니다. 봄 절기의 죽음과 여름 절기의 증거의 시간을 지나, 마침내 안식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유월절이 1월이 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새 역사가 시작된 첫 달로부터 일곱 번째 달에 안식이 열립니다. 이스라엘의 일곱 절기 안에 역사의 처음과 끝이, 예수의 생애와 성도의 인생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그 미술관의 여성은 오래 서서 그림을 바라보다 결국 의미를 찾지 못하고 돌아섰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이 세상이라는 전시장은 다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의미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절기가 그것을 말해주었습니다. 복음이 그것을 열어주었습니다.
이곳은 무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덤답게 살면 됩니다. 열심히 죽으면 됩니다. 그리고 그 죽음 너머에 초실절이 있고, 오순절이 있고, 마침내 가을 절기의 찬송이 있습니다. 무덤은 끝이 아닙니다. 무덤은 통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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