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로마서 2:6~11)
어린 시절, 외할머니는 아침마다 장독대 앞에 정화수 한 그릇을 떠 놓고 두 손을 비볐습니다. 무엇을 비는지 물으면 늘 같은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착하게 살면 복 받는 거야. 하늘이 알아." 그 말 안에는 우리 안에 깊이 새겨진 하나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선을 쌓으면 선이 돌아옵니다. 악을 행하면 반드시 그 값을 치릅니다. 동양의 오랜 사유는 이 질서 위에 서 있습니다.
철학자들은 이것을 인연생기라 불렀습니다. 자기 존재가 원인이 되어 미래의 결과를 빚어낸다는 논리입니다. 우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인과의 그물이며, 인간은 그 그물 안에서 오늘의 씨를 뿌려 내일의 열매를 거두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노자는 "훌륭한 사람을 숭상하지 않으면 백성이 다투지 않는다"고 했고, 석가는 생로병사의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수행의 목적이라 가르쳤습니다.
결국 그 모든 가르침의 뿌리는 같습니다. "지금 잘 살아야 한다. 착하게, 성실하게. 그래야 미래의 나를 구할 수 있다." 그런데 성경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2장 6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이 구절을 처음 읽는 사람은 고개를 끄덕입니다. "역시 착하게 살아야지, 선한 일을 많이 해야 천국에 가는 거야."
오래전 한 유명한 성경 교사가 이 본문을 강해하며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 그리스도인 농부가 있었는데, 아랫논 주인이 자꾸 물꼬를 터서 그의 논물을 빼 갔습니다.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농부는 따지러 가는 대신 아예 아랫논에 먼저 물을 대주고 자기 논에 물을 댔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해석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바울이 이 구절을 쓴 맥락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2장을 쓴 것은 선행을 독려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로마 교회 안에 깊이 뿌리내린 유대주의 인본주의를 겨냥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앞 구절들에서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여기서 지목되는 '못된 행함'은 살인도 도둑질도 아닙니다.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고, 자기의 행위를 기준 삼아 남을 재단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행함에 하나님의 진노가 쌓인다고 경고한 직후, 6절로 이어집니다.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는 말은 '착한 일 많이 해라'는 권고가 아니라, '외모로 사람 판단하는 것, 그것도 하나님 앞에서 보응받는다'는 경고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7절에 나오는 '선한 행함'이란 무엇입니까?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행함입니다.
영광(독사)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본질이 보이게 드러난 것입니다. 존귀(티메)는 단순히 '귀함'이 아니라 '지불된 값, 대가'를 뜻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 20절에서 바울은 "너희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고 쓰는데, 여기서 '값'이 바로 이 '티메'입니다. 그러니 영광과 존귀란 하나님의 본질을 입고 내려와 죄인들의 몸값으로 치러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썩지 아니함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은 성도가 "썩지 아니할 씨", 곧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났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영생으로 보응받을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하는' 자, 즉 그분의 공로와 은혜만을 의지하는 자들입니다. 선한 행함이란 그것입니다. 믿음입니다.
몇 해 전,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 온 한 중년 여성이 담임 목사를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수십 년간 교회 봉사를 해 왔고, 새벽기도도 거르지 않았으며, 십일조도 빠짐없이 드렸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암 진단을 받았고, 아들은 사업에 실패했으며, 자신은 갑자기 해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녀가 목사 앞에서 한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만큼 했는데,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십니까?"
그 물음 안에는 오래된 방정식이 있었습니다. 내가 원인을 제공했으니 하나님은 그에 합당한 결과를 내놓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평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방정식은 복음이 아니라 동양 사상의 인과응보였습니다.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는 외할머니의 정화수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이렇게 씁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가 복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보상의 근거로 내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종류의 선한 일은 하나님 앞에서 계수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선한 일은 불필요한 것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그 방향이 다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6장에서 십자가 수난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막아섰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스승을 사랑하는 몸짓처럼 보였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베드로가 버린 것들인 배, 그물, 삶의 자리, 그 모든 투자가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향해 "사단아 물러가라"고 하신 뒤, 곧바로 이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의 가능성과 욕망과 공로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는 인간 존재의 가치를 높이는 것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인간의 성숙, 인간의 행복, 인간의 구원, 그 모든 서사의 주인공은 언제나 인간 자신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다릅니다. 복음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닙니다. 복음 안에서 인간은 오히려 '나'라는 주인공 자리를 내어놓는 방향으로 이끌립니다.
기생 라합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녀는 자신이 속한 나라를 이스라엘 정탐꾼들에게 넘겼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뿌리와 정체성, 곧 '나'를 이루는 모든 것을 내어버리는 행위였습니다. 그 나라가 곧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그것을 행함 있는 믿음의 예로 듭니다. 라합의 '선한 일'은 선량한 행동이 아니라 자기의 죽음을 자처하는 믿음의 몸짓이었습니다.
믿음이 깊어진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어떤 이들은 믿음이 자라면 자신감이 생기고, 더 의롭게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주는 믿음의 성숙은 반대 방향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사도로서 열심히 사역하는 중에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그 고백의 끝에 그가 발견한 '선한 일'은 단 하나였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하노라." 그것이 믿음이었고, 행함이었고, 성도의 선이었습니다.
나에 대한 신뢰가 낮아질수록 예수님에 대한 의존이 깊어집니다. 믿음의 성숙이란 더 잘하는 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예수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자'임을 날마다 더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그렇게 쇄해져 가는 삶, 그것이 자기부인이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인과응보가 맞다면 은혜라는 단어는 거기에 쓸 수 없습니다. 인과응보와 은혜는 모순입니다.
복음은 원인 없이 결과가 주어지는 사건입니다. 정확히는, 원인이 없지 않으나 그 원인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원인은 하나님께 있고, 그 결과가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만큼 했으니 하나님이 저만큼 주셔야 한다는 방정식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이 단락을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롬 2:11)는 말로 마무리 짓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착한 일 경쟁을 붙여 놓고 이긴 자에게 상을 주실 리 없습니다.
정화수 앞에서 두 손을 비비던 외할머니의 기도가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 안에 담긴 간절함과 성실함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다만 그 방정식, 내가 원인이 되어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복음이 말하는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은 내가 쌓아서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치러진 값을 받아 챙기는 것입니다. 그 빚은 내가 진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지셨습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 행위를 근거로 남을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아는 사람이 어떻게 게으르게 살 수 있겠습니까? 은혜를 받은 자는 보상을 바라지 않고 성실해집니다.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드러나는 삶을 향해, 날마다 조금씩 쇄해지면서 말입니다.
'로마서 말씀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남을 판단하는 것의 죄 - 저주받을 세상의 심판자들 (0) | 2026.03.07 |
|---|---|
| 무덤에서 살다, 성도의 인생을 다시 읽다 (0) | 2026.02.27 |
| 무덤으로 넘겨지다 - 성도의 실체와 은혜 (0) | 2026.02.20 |
| 당신은 정말 괜찮은 사람입니까? (0) | 2026.02.13 |
| 진노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죄인들 (1) | 2026.0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