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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말씀 묵상

하나님이 지으시는 집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3. 29.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 하심이니라."(로마서 2:6~11)

어느 산골 마을에 오랫동안 무너진 채로 있던 낡은 집이 하나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 폐허를 볼 때마다 안타까워하며 저마다 한마디씩 보탰습니다. "저 집 좀 어떻게 해야 하지 않겠어?"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서 가장 부지런하다는 사내가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혼자 벽돌을 쌓고,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비가 조금만 와도 벽이 젖었고, 바람이 불면 문짝이 흔들렸습니다. 기초가 잘못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지어도, 기초가 흔들리는 집은 결국 무너집니다.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들려주는 이야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지으려 하는 집과,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손수 지으시는 집, 이 두 집의 대결이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큰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본능 중 하나는 스스로 무언가를 이루어 내려는 충동입니다. 그것이 삶의 의욕처럼 보이기도 하고, 성실함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충동의 뿌리를 날카롭게 지목합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은혜를 인정하는 대신, 자신의 주체성과 존재성을 스스로 챙기려는 시도가 타락의 정체라는 것입니다.

존재란 본래 없음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음을 있음으로 불러내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존재의 역할은 오직 하나, 자신을 있게 하신 그 은혜를 인정하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에덴에서부터 그 역할을 거부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말 한마디에 스스로 신이 되려 했습니다. 그게 바벨탑의 정신이고, 온갖 종교적 열심의 뿌리이며, 우리가 날마다 내면에서 반복하는 패역입니다.

바벨탑 건설 현장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이 게을렀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열심히 벽돌을 구웠고, 서로를 독려했으며, 목표를 향해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연합을 허무셨습니다. 문제는 열심의 양이 아니라 열심의 방향이었습니다. 그 모든 열심의 지붕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인간들의 능력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저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도 우리 안에서 동일한 바벨탑 공사가 진행됩니다. 조금 더 선하게 살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는 생각, 조금 더 열심히 봉사하면 축복이 따라올 것이라는 계산, 내가 이만큼 했으니 하나님도 이만큼은 해 주셔야 한다는 암묵적 거래, 이 모든 것이 내 안에서 쌓아 올리는 바벨탑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특하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가장 정교하게 포장된 불순종이라고 하십니다.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사 66:3) 인간이 지으려는 집은, 아무리 화려해도, 기초가 없는 집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집을 지으시는가? 창세기 첫 장을 펼치면, 창조 이전의 세계가 나옵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 아무것도 없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십니다. '운행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라하프'는 암탉이 알을 품듯 온몸으로 덮어버리는 행위입니다. 창조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덮으시자, 빛이 생기고, 하늘이 열리고, 땅이 드러나고, 생명이 피어납니다. 하나님의 집짓기는 처음부터 '
덮으심'이었습니다.

사람을 만드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흙으로 빚으신 후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자 비로소 생령이 됩니다. 생명은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덮으심, 성령의 임재가 없으면 흙은 그냥 흙입니다. 이 덮으심의 은혜는 역사 전체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인간이 타락하여 벗었을 때, 하나님은 제물의 희생으로 마련된 옷을 덮어 주셨습니다.

노아의 시대에는 방주로 덮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걸을 때는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덮으셨습니다. 성막을 지을 때는 지혜의 성령을 장인들에게 부어 덮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순절에 불의 혀 같은 성령이 제자들 위에 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집짓기 방식은 언제나 같습니다. 인간의 자율성을 허무시고, 그 자리에 성령을 덮으시는 것입니다.

한 젊은 신학생이 잠언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노트 한 가득 '
지혜로운 삶의 원칙'을 정리했습니다. 분노를 다스리는 법, 말을 절제하는 법, 부지런히 사는 법, 그리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이대로만 살면 됩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그 신학생이 목사가 되었을 때, 그는 조용히 그 노트를 꺼내 보며 말했습니다. "나는 이것을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

잠언은 우리가 지켜내야 할 도덕 교과서가 아닙니다. 잠언의 첫 줄은 의미심장합니다.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잠 1:1). 솔로몬은 그냥 솔로몬이 아닙니다. 사무엘하 7장의 다윗 언약에서 약속된, 하나님이 손수 지어주시겠다고 하신 집을 완성할 그 왕의 모형입니다. 그 솔로몬에게 지혜의 성령이 부어진 것은 오직 한 가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성령의 덮으심으로만 지어진다는 것입니다.

잠언 8장에서 지혜는 태초 창조의 현장에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9장에서는 지혜가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은 후, 지혜 없는 자들에게 외칩니다.
"내 식물을 먹고 내 포도주를 마시라." 그것이 무슨 뜻인가? 성전은 인간의 지혜와 노력으로는 절대 지어질 수 없으며, 지혜이신 하나님이 예비하신 어린양의 살과 피만이 그 건축의 유일한 재료라는 선언입니다.

아가서는 또 어떤가? 검고 게달의 장막 같은 술람미 여인이 왕의 신부가 됩니다. 그녀가 신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왕의 불가항력적인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여자들, 즉 율법을 잘 지키는 그럴듯한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은 검은 술람미를 택하셨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탄생 이야기입니다. 자격 없는 자를 택하시는 왕의 사랑으로 세워지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전도서는 냉정하게 선언합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스스로 하늘에 이르는 길을 내려는 인간의 모든 수고는 헛것입니다. 욥기는 의인 욥조차 자신의 됨됨이를 근거로 하나님 앞에 서려 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마침내 그를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게 이끕니다.

시편은 다섯 권 전체가 탄식에서 찬송으로 가는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입니다. 시가서 다섯 편은 모두 하나의 진리를 향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만, 성령의 덮으심으로만 완성됩니다.

성전 뜰에서 상을 엎으시던 예수님을 사람들이 몰아붙였습니다.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예수님의 대답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사람들은 46년 걸려 지은 건물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예수님은 당신의 몸 이야기를 하고 계셨습니다. 이 한 장면이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인간들이 46년을 쏟아 세운 것과, 예수님이 사흘 만에 세우시는 것. 전자는 인간의 힘과 열심의 총합이고, 후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총체입니다. 전자는 무너지는 것이고, 후자는 영원히 서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과 성전은 원래 아름다운 계시였습니다. 스스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인간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오직 어린양의 피를 의지해야만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있음을 가르치는 그림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 그림을 뒤집었습니다. 율법을 내 힘으로 지켜냄으로써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옛 성전의 실패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성전을 부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몸이라는 새 성전을 세우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삭제되고, 오직 예수만이 남는 자리가 새 성전입니다.

어떤 어머니가 오랜 병상에서 힘겹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딸이 옆에서 물었습니다.
"엄마, 천국에 가면 뭘 하고 싶어?" 어머니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습니다. "거기 가면 내가 원하는 걸 다 할 수 있겠지." 그 딸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서글퍼졌습니다. 어머니가 상상하는 천국 안에도 여전히 '내가 원하는 것'이 중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들의 마지막 바벨탑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지붕이 되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덮어버리시는 나라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은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거하다'는 말이 헬라어로 '스케노오', 곧 '장막을 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장막이 되셔서 우리를 덮어버리시는 것이 천국의 완성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저 먼 미래에 있는 상급이 아닙니다. 천국은 지금 우리가 부수어지는 이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죽은 자입니다." 이 고백이 쌓이는 곳에 하나님이 장막을 치십니다. 그래서 성도의 인생은 처음 것들이 하나씩 죽어가는 자리입니다. 내 야망이 죽고, 내 자존심이 죽고, 내 가능성이 죽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두렵지 않은 것은, 그 빈 자리를 하나님이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엡 2:22) 우리는 집을 짓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어지는 집입니다. 그것도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건축자이신 하나님의 방식으로, 때로는 벽이 무너지고, 때로는 기둥이 뽑히는 방식으로 지어집니다.

오늘 당신의 인생에서 무언가가 무너지고 있다면, 어쩌면 그것은 재난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기초 없는 집이 허물어지는 것이고, 그 자리에 무너지지 않을 집이 세워지는 중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짓고 계십니다. 예수 안에서, 성령으로 말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계 7:15,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