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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말씀 묵상

남을 판단하는 것의 죄 - 저주받을 세상의 심판자들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3. 7.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로마서 2:1~5)

지하철 안에서 노인이 큰 소리로 통화를 합니다. 맞은편에 앉은 사람의 눈썹이 올라갑니다. 카페에서 아이가 뛰어다닙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부모에게 꽂힙니다. 뉴스에 범죄자의 얼굴이 나오면 댓글창은 순식간에 판결문으로 가득 찹니다. 우리는 매일, 거의 숨 쉬듯이 누군가를 판단합니다.

그 판단이 항상 틀린 것은 아닙니다. 공공장소에서의 예절이 있고, 지켜야 할 선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판단이 어느 순간 다른 무언가로 바뀌는 지점이 있습니다. 단순히
'저 행동은 잘못됐다'에서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로, 더 나아가 '저런 사람은 어떻게 되어야 마땅하다'로 넘어가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 우리는 재판관의 의자에 앉게 됩니다.

성경은 바로 그 의자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롬 2:1) 다른 사람을 판결하는 그 순간, 판결하는 자 자신이 피고석에 앉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서재에 들어가본 적이 있다면 기억할 것입니다. 묵직한 나무 책상, 그 앞에 놓인 큼직한 가죽 의자, 아버지가 없을 때 그 의자에 살짝 앉아보면 어딘가 불편했습니다. 자리가 너무 컸습니다. 거기 앉아있는 내가 어색했습니다. 그 의자는 내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을 판단하는 권한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원래 인간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이야기는 단순히 금지된 과일을 탐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간이 손에 넣으려 한 것은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는 능력, 즉 하나님의 자리였습니다. 그것을 손에 넣는 순간부터 인간은 서로를 향해 끊임없이 판결문을 발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법을 만들고, 도덕을 세우고, 그 기준으로 이 사람은 좋고 저 사람은 나쁘다고 갈랐습니다. 그런데 그 기준을 만든 것도 인간이고, 그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도 인간입니다. 판사가 자기 사건의 재판관이 되는 꼴입니다.

몇 해 전, 음주운전으로 사람을 치어 숨지게 한 운전자의 선고 공판이 열렸습니다. 방청석을 가득 채운 사람들은 판결이 너무 가볍다며 분노했습니다. 그 분노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법정을 나서던 한 중년 남성이 카메라 앞에서 말했습니다.
"저런 인간은 평생 가둬야 해요. 저는 절대 저렇게 살지 않아요." 그 말 속에는 두 개의 확신이 있었습니다. 저 사람은 나쁘다는 것, 그리고 나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적하는 것은 바로 그 두 번째 확신입니다. 그는 로마서 1장에서 살인, 시기, 교만, 무정함 같은 죄의 목록을 길게 나열한 뒤, 2장으로 넘어오자마자 그것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당신도 같은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모든 행위가 똑같다는 말이 아닙니다. 더 깊은 곳의 이야기입니다. 죄의 뿌리인 자신을 기준 삼아 세상을 재단하려는 그 충동은 피고석에 앉은 사람이나 방청석에 앉은 사람이나 정확히 같은 곳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판단하는 자가 스스로를 정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심판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된다."(롬 2:2) 진리는 사람이 만들어낸 도덕 목록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의 행위 점수표도 아닙니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그분이 기준인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들은 누가 보아도 올바르게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루에도 여러 번 손을 씻었고, 헌금을 정확히 계산했으며, 율법의 세세한 조항까지 지켰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

그들이 항변했습니다.
"우리가 왜 죄의 종입니까?" 그 항변 속에 이미 답이 들어 있었습니다. "나는 충분히 좋은 사람이다. 나는 저 세리나 창녀와 다르다. 그러니 나는 그들을 내려다볼 자격이 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생각이 죄라고 하신 것입니다.

자신을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행위는 폭력적이지 않기 때문에 더 눈에 띄지 않습니다. 도덕적으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에 더 오래갑니다. 그래서 더 위험한 것입니다. 노골적인 범죄자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압니다. 그러나
'나는 선한 사람이다'라는 확신 속에서 타인을 판단하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채기 어렵습니다.

도시의 고급 주거지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높은 담, 폐쇄회로 카메라, 외부인을 막는 게이트, 더 높이 올라갈수록 담은 더 높아지고, 갈 수 있는 식당은 줄어들며,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좁아집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특권이라 부르지만, 실제로는 자발적인 감금입니다.

명품 가방의 진짜 가격표는 가죽의 질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것을 살 수 없는 사람과 나는 다르다'는 선언입니다. 그 선언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 합니다. 그런데 그 방식의 결말은 언제나 같습니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모든 이가 경쟁자가 되고, 결국 혼자만 남게 됩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스스로를 끊어낸 채 홀로 갇히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끊임없이 아래에 두어야만 자신이 서 있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지옥의 구조입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저마다 조금 더 구별된 그곳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자리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스스로 결심하고 각성하여 판단을 멈추면 될까요?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4절에서 그는 묻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느냐?"

어떤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아들은 수년째 마약을 끊지 못했습니다. 가족에게 거짓말을 했고, 돈을 훔쳤으며, 연락을 끊었습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매일 아들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어느 겨울 새벽, 아들은 차가운 골목 바닥에서 눈을 떴습니다. 그 순간 이유도 모르게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회개였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은 어디서 왔습니까? 아들이 먼저 결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매일 그를 향해 흘러가던 어머니의 사랑이 그 골목까지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신실함을 낳고, 그 신실함이 우리에게 임하여 우리가 비로소 돌아서게 된다고 말합니다. 회개도, 믿음도, 그 출발점은 우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은혜로 이 자리에 오게 된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타인을 판단한단 말입니까?

성경에는
'히브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입니다. 이 말의 뿌리는 '에벨'인데, 그 뜻은 단순합니다. '건너간 자들'입니다. 아브라함이 살던 곳은 지금의 이라크 지역, 고대 바빌로니아 문명의 한복판이었습니다. 그곳은 인간의 능력과 문명이 절정에 달한 도시였습니다. 거기서 아브라함의 집안도 다른 신들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길을 떠났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히 11:8) 그가 용감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부르는 힘이 그보다 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강 저편에서 강 이편으로 건너온 사람들이 히브리, 곧 에벨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때 홍해를 건너고, 가나안 입성 때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같은 이야기입니다. 스스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곳에서, 하나님이 끌어내어 건너가게 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여전히 익숙한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자신이 기준이 되고, 자신이 옳고, 타인을 내려다볼 수 있는 그 자리로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어이 우리를 그 강 이편으로 데려가십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후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벌거벗었음을 깨닫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치마를 그냥 두지 않으셨습니다. 짐승을 잡아 가죽옷을 입히셨습니다.

왜그랬을까요? 무화과 잎 치마의 문제는 재료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이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판단하고, 스스로 그것을 가리려 한 행위였습니다. 나의 기준으로 나의 수치를 나의 방법으로 해결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찢으셨습니다. 그리고 짐승이 피를 흘려야 만들어지는 가죽으로 옷을 입히셨습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덮을 수 없습니다. 다른 생명의 희생으로만, 하나님이 건네주시는 것으로만 덮힙니다. 도덕이든, 종교적 열심이든, 남보다 나은 행실이든, 그것으로 자신을 충분한 존재로 만들려는 모든 시도는 무화과 잎 치마입니다. 잠깐은 가릴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 시들어 바스러집니다. 그리고 그 치마를 두르고 타인을 판단할 때, 그 판단은 정작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옵니다.

바울은 5절에서, 돌이키지 않고 자기 기준으로 살아가는 자들은 스스로 심판을 쌓아가고 있다고 냉정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 경고 바로 앞, 4절에는 전혀 다른 음조의 물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따뜻함이 너를 이끌어 돌아서게 하셨다는 것을 정말 모르느냐고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우리가 먼저 각성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진흙 속에서 허우적대는 동안,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이 누구를 정죄하겠습니까? 우리는 그저
"제가 틀렸습니다. 도와주십시오" 하며 그 은혜를 붙들면 됩니다. 앞으로도 우리의 부끄러운 민낯은 계속 드러날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절망으로 가지 마십시오. 그 드러남이 오히려 우리를 은혜 앞으로 더 깊이 데려가는 길입니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됩니다. 애통의 저녁인 이 시간을 지나,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시는 기쁨의 아침으로 건너가는 것이 건너간 자들, 에벨의 여정인 것입니다.